국내도 ‘조용한 사직’ 바람… “무책임하다” vs “현명한 태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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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서 처음 등장해 전 세계로 번져
재택근무에 회사 소속감 낮아지고 일-삶 균형 중시하는 경향 반영
“열심히 일해 승진해도 파리목숨”… 한국 2030세대서 압도적 지지
고도 성장기 기성세대와 온도차… 英선 ‘조용한 해고’ 반발 일기도

미국 뉴욕의 직장인 자이들 펠린이 7월 자신의 틱톡 계정에 “조용한 사직이란 일을 더 잘하려는 생각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올린 영상. 2030 직장인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자이들 펠린 틱톡 캡처
미국 뉴욕의 직장인 자이들 펠린이 7월 자신의 틱톡 계정에 “조용한 사직이란 일을 더 잘하려는 생각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올린 영상. 2030 직장인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자이들 펠린 틱톡 캡처
지난달 15일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 여파로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을 비롯해 카카오페이, 카카오모빌리티 등 카카오 서비스가 먹통이 됐다. 카카오 차원에서 ‘비상사태’였던 상황에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앱 ‘블라인드’에 카카오 직원 A 씨의 글이 올라왔다.

“나라 구하는 보람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오너도 자본주의를 좋아한다는데, 책임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지 않나? 장애 대응 보상 가이드라인이 무급 맞다길래 쿨하게 노는 중.”

이를 둘러싸고 직장인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편에선 “저런 무책임한 직원 때문에 회사 망한다”고 A 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게 현명한 태도다. 요즘 2030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는 옹호가 나왔다.

○ ‘조용한 사직’ 열풍에 ‘조용한 해고’ 유행



신조어인 ‘조용한 사직’은 실제 퇴사하진 않지만 자신이 맡은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는 업무 태도를 뜻한다. 올 7월 미국 뉴욕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 펠린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틱톡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유행했다.

펠린은 17초짜리 영상에서 지금 ‘조용한 사직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일 이상의 노동과 열정을 바라는 ‘허슬(hustle)’ 문화를 그만두는 것”이라며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 영상은 30일까지 약 350만 회 이상 조회되고, 49만5000회 공감을 받았다. 직장에 마음을 두지 않고 최소한의 업무만 한다는 이 신조어는 전 세계 2030 직장인들이 ‘#조용한사직’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들을 올리며 SNS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9월에 미국인 18세 이상 근로자 1만5000여 명을 설문조사한 뒤 “미국인 근로자 50% 이상이 사실상 ‘조용한 사직’ 중”이라고 밝혔다. 갤럽은 응답자들에게 업무 몰입도를 물어본 결과 각각 ‘업무에 몰입 중’(32%)이라거나 ‘큰 불만을 갖고 있다’(18%)고 답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50%에 주목했다. 이들을 일에 열중하거나, 큰 불만도 없이 회사를 다니는 ‘조용한 퇴사자’로 분석한 것이다. 갤럽은 특히 35세 미만 청년 근로자들의 직장에 대한 기대가 현저히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 역시 “조용한 사직은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로 MZ세대가 주도한다”며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대퇴직(Great Resignation)’의 연장선”이라고 분석했다.

서구권에서도 이들을 ‘게으른 직원’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국 BBC방송은 “조용한 사직에 맞서 기업은 게으른 직원에게 업무를 주지 않는 등 ‘조용한 해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최근 물가가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실질 임금이 낮아지면서 조용한 사직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 한국도 조용한 사직이 ‘2023년 트렌드’로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고생만 더 할 것 같은데….”

금융권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 씨(32)는 회사 내 ‘주요 부서’로 꼽히는 자리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잠시 고민한 뒤 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해서 승진해 봐야 임원이 되는 건데, 임원은 파리 목숨이고 큰 장점도 없다”며 지금 부서에 남기로 했다. 그 대신 맡은 업무를 ‘문제 생기지 않을 정도로’ 처리하고, 제 시간에 퇴근 후 저녁엔 아내와 함께 집밥을 해 먹는다. 달리기도 즐기고 있다.

한국에서도 김 씨와 같은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12월 직장인 392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0%가 “딱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응답했다. 특히 20대와 30대 직장인의 78.5%, 77.1%가 이렇게 답한 반면, 40대(59.2%)와 50대(40.1%)로 갈수록 그 비율이 낮아졌다. 이른바 MZ세대가 상대적으로 ‘조용한 사직’에 더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내놓은 ‘트렌드 코리아 2023’도 내년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짚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조용한 사직을 꼽았다. 직장생활 7년 차인 조모 씨(32)는 “이 단어를 듣고 나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며 “입사할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회사생활이 생각 같지 않다 보니 할 만큼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고 전했다.

이런 조용한 사직 분위기가 기업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무조건 비판하기보다는 합리적인 보상 체계를 만들고 내적 동기 부여를 하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MZ세대에게는 보수나 복지보다 구성원이 함께 성장해갈 수 있는 회사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조용한 사직#조용한 해고#근로자#2023년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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