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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식탁여왕, 남편=심부름꾼, 할머니=육아고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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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식탁여왕, 남편=심부름꾼, 할머니=육아고객

동아일보입력 2010-02-06 03:00수정 2010-02-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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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가족 트렌드, 홈쇼핑 방송 속에 多 있다금요일 출근시간대 반찬판매 시청률 2배로■ 여성지위 ↑ 남편위상 ↓ 반영 아이디어상품 ‘대박’
“여왕님 드시지요” 가족의 식사 준비로 굽고 볶고 끓이느라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전통적인 주부상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온 가족이 먹을 삼겹살을 구우면서 찌개까지 함께 끓일 수 있는 넓은 그릴이 홈쇼핑에서 히트한 것은 주부도 식탁의 당당한 일원이 됐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사진 제공 GS샵
고기 굽는 그릴(불판)을 팔면서 홈쇼핑 쇼호스트가 앞치마가 아니라 공주님 드레스를 입었다? 최근 홈쇼핑 업체인 GS샵의 최고 히트 상품인 ‘프린세스 전기 그릴’의 별칭은 ‘엄마도 같이 먹는 불판’이다. 쇼호스트는 한 번에 고기를 2, 3인분밖에 못 올리기 때문에 남편과 아이가 배를 채우는 동안 정작 주부는 고기 몇 점 맛보기가 힘든 기존 그릴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신제품은 65cm에 이르는 긴 그릴 덕분에 온 가족이 먹을 고기에 찌개 뚝배기, 기름 마늘 종지까지 동시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품명이 ‘공주’인 이 전기그릴의 히트 배경에는 변화하는 한국 가족문화의 코드가 숨어있다.

변화하는 가족문화 코드 중 하나가 식탁문화에서 여성 지위의 향상이다. 전통적 식문화에서 ‘엄마’는 늘 주변인이었다. 요약하면 삼겹살을 ‘먹는 존재’가 아니라 ‘굽는 존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찌개 끓여 나르랴, 기름 마늘 준비하랴, 주방과 식탁을 분주히 오가느라 여성은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녀의 겸상이 일반화되고 주부가 식탁의 당당한 일원이 되면서 ‘엄마’는 ‘하녀’가 아닌 ‘공주’가 됐다. 쇼핑 호스트가 방송에서 입은 공주 복장에는 “가족만 챙기지 말고 스스로를 돌보라”는 메시지가 함축돼 있다.

○ 현대 가정 풍속도 비춰주는 거울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을 많이 다루는 홈쇼핑 방송은 한국의 가족 풍속도를 들여다보는 매끈한 거울이다. 1분에 컴퓨터를 4200만 원어치 팔아 기록을 세운 한 쇼호스트는 자신이 쓴 책에서 “홈쇼핑을 보면 그 나라 사람의 정서까지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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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홈쇼핑 방송 편성을 보면 지난해 통계청 조사 기준으로 전체 가구의 40.1%에 이르는 맞벌이 가구가 한국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CJ오쇼핑은 지난해 매주 금요일 오전 7시에 반찬 판매 방송을 편성했다. 이 시간대에는 원래 일찍 잠에서 깨는 장년층을 타깃으로 건강용품, 등산용품을 주로 팔았다. 식품은 시청자가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는 오후 3, 4시경이 좋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평일에는 바깥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맞벌이 부부들이 금요일 저녁부터는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금요일 출근시간대에 “출근 전 주문하면 저녁 식탁에 올려놓을 수 있다”며 당일배송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더니 시청률이 2배 가까이 뛰었다.

육아 책임을 부부에게 함께 지우는 사회적 흐름도 읽힌다. 현대홈쇼핑은 과학 그림책 판매 방송을 유아, 아동용 상품의 전통적 편성시간(오전 10시∼오후 4시)이 아닌 오후 10시 이후에 내보냈다. 교육에 관심이 높은 젊은 아빠들의 퇴근 후 시간을 노크한 것. 결과는 ‘대박’이었다.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자연, 과학다큐멘터리를 보고 자란 젊은 아빠들의 주문이 크게 늘어나면서 다른 시간대에 방송했을 때보다 매출이 20%가량 뛰었다는 것이다.

홈쇼핑은 남녀 역할을 가르는 전통적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7년 GS샵에서 선보인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 ‘루펜’의 방송에는 남성 쇼핑호스트가 전격 투입됐다. 그는 “남편 여러분! 아침마다 물 떨어지고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 들고 엘리베이터 타느라 힘드셨죠?”라며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가 ‘남편’을 위한 것이라고 은연중 강조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려야 하는 남편의 고충을 해소해 준다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한 결과 1년 만에 매출이 60억 원을 넘었다.

GS샵 관계자는 “최근 2년간 음식물 처리기를 구매한 30, 40대 남성 고객 비율이 30%에 육박했다”며 “홈쇼핑 주 이용층이 30, 40대 여성임을 감안하면 남성 구매 비율이 높은 상품”이라고 말했다.

○ 남편은 청소하고 할아버지는 기저귀 챙겨

CJ오쇼핑이 매주 금요일 오전 실제 부부인 쇼호스트 김수진 씨와 의사 표진인 씨를 내세워 진행하는 ‘우리 진짜 결혼했어요’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활, 아동용품을 주로 판매하는 이 방송의 자료화면에는 남편 표 씨가 상품을 사용하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한다. 자외선 살균 청소기로 소파나 카펫을 청소하는 것도, 원목과 자석으로 만든 블록으로 아들과 놀아주는 것도 표 씨의 몫이다. 송호재 CJ오쇼핑 PD는 “자료화면을 만들 때 남편의 가사 및 육아 분담 비중이 늘어난 점을 반영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영유아용 교육용품 방송 자막이 평소보다 커 보이면 십중팔구 손자 손녀의 양육과 교육에 관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겨냥한 방송이다. 현대홈쇼핑이 지난해 자사의 인터넷쇼핑몰 구매실적을 조사했더니 50, 60대 남성 고객이 가장 많이 사간 상품은 다름 아닌 기저귀였다. 현대홈쇼핑 관계자는 “맞벌이로 바쁜 자녀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 손녀의 기저귀나 도서 등을 구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가족문화의 코드 변화를 간파한 홈쇼핑업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TV 앞에 많이 앉는 평일 오전 시간대에 영유아용 교육용품을 전진 배치하고 있다. GS샵 관계자는 “영유아 교구재를 구입하는 50, 60대 고객이 최근 2년간 20%가량 늘었다”며 “이런 점을 고려해서 영유아용 교육상품 방송에 쓸 자막은 노인들의 시력을 배려해 평소보다 크게 만든다”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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