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性대결 촉발시킨 “아몰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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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몰랑(아, 몰라).”

논쟁을 벌일 때, 가장 무서운 상대는 누구일까요? 과거에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말을 알아듣고 무섭게 따지는 사람보다 말을 이해조차 못하는 사람이 더 어려운 상대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보다 더 센 강적이 나타났습니다. “아몰랑”이라고 대답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왠지 외국어처럼 들리는 단어 ‘아몰랑’은 ‘아, 몰라’라는 말을 독특하게 표현한 단어입니다. 맨 뒤에 ‘ㅇ’을 붙여 애교스럽게 들리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논쟁을 벌이다가 더이상 논리로 이길 자신이 없을 때 ‘아, 몰라’ 하고서 휙 돌아서서 싸움을 끝내버릴 때 쓰는 말이죠.

그동안 이 단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정치, 사회에 관한 과격한 발언을 일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자들을 비꼬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비리가 너무 많아 걱정된다”는 글을 남긴 뒤 그 자세한 근거를 묻는 사람들을 향해 “아, 몰라! 그냥 나라 자체가 짜증나”라고 답하는 사람들이죠. 주장은 강하지만 근거가 없어 생산적인 논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부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단어가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이며 다시 등장했습니다. 개그맨 장동민 씨가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일삼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일부 남성들은 ‘원래 한국 여자가 그렇게 개념이 없지 않느냐’, ‘틀린 말 아니다’라고 장 씨를 두둔했습니다. 여성들은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 장 씨는 연예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때 서로의 주장과 근거를 담은 글들이 오고가면서 ‘아몰랑’이라는 단어가 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말싸움하다가 질 것 같으면 꼭 ‘아, 몰라’ 하고 도망간다”는 남성들의 비난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는 각종 ‘아몰랑’ 패러디물을 쏟아내며 싸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다툼은 ‘남초 사이트’와 ‘여초 사이트’의 대결 구도로 번져 나갔습니다. 지금도 일베를 필두로 한 남초 사이트와 ‘여성시대(여시)’로 대표되는 여초 사이트에서는 서로를 비방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몰랑’ 단어가 남녀 대결 구도에 활용되다 보니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웹툰 작가 ‘레스트바티칸(레바)’은 최근 자신의 만화에 이 ‘아몰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를 본 여성시대 유저들이 ‘여성 혐오 용어다’ ‘일베 용어다’라며 작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아몰랑’이라는 단어가 여성 혐오에 쓰는 단어인지도 몰랐고, 일베를 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성시대 측의 비난이 끊이지 않아 작가는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이 지나쳐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공격하는 여성들은 “가만히 자숙이나 하라”며 비난을 이어갔습니다.

‘아몰랑’은 요즘처럼 SNS상의 사회 논쟁이 뜨거운 상황에선 가장 강력하고 손쉬운 무기가 됩니다. 자신의 주장에 누군가 반론을 펼치면 ‘아몰랑’ 하고 도망갑니다. 인터넷을 통한 건전한 토론 문화가 자리 잡는 데 ‘아몰랑’은 찬물을 끼얹는 존재입니다. 주장을 하다가 말싸움에서 밀리면 ‘아몰랑’ 카드를 내밀게 되고 더이상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몰랑’은 남녀 대결에서 문제가 된 단어였지만 인터넷을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단어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자유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면 그에 대한 적합한 해명을 해야 하는 책임도 따르기 때문입니다. 책임감 있는 설명 대신 ‘아몰랑’을 남발하게 되면 토론하는 상대방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오늘도 SNS에는 쉴 새 없이 글이 올라옵니다. 예비군 훈련장 총기 난사, 아직 끝나지 않은 성완종 게이트 수사, 국민연금에 관한 논쟁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말이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할 겁니다. 여기에 “아, 몰라! 아몰랑!”이란 말 대신 각자의 합리적인 주장을 담은 댓글들이 이어진다면 우리의 토론 문화도 조금 더 발전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수연 정책사회부 기자 sykim@donga.com
#아몰랑#여성 혐오#일베#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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