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흔드는 ‘팬데믹 위기’… 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다[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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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벌써 3주째다.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처럼 갇혀버린 답답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워싱턴의 세미나와 콘퍼런스, 업무 오·만찬과 미팅은 전부 취소됐다. 식당과 바, 커피숍이 모두 문을 닫아버려 사람을 만날 장소조차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주별로 자택대피령과 통금 같은 조치들이 속속 취해지면서 수도인 워싱턴도 이미 유령도시가 됐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초등학생 두 아들과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것도 일이다. 두 아이는 여름방학을 포함한 8월 말까지 5개월간 학교에 못 간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모든 초중고교가 문을 닫는다는 주 정부의 발표에 학부모들은 이른바 ‘멘붕’이 됐다. 사재기 행렬에 동참하지 못해 평소 3배 값을 주고 간신히 주문한 마스크와 손 세정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 “그래도 의료대란 아우성 속에 사망자가 속출하는 지역보다는 낫다”며 서로를 위로한다.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유럽의 다른 선진국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황이 악화되는 속도는 미국이 더 빠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뒤늦게 취한 대응 조치는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먼저 드러나고 있고, 그 경제적 사회적 파장도 확산일로다. 우왕좌왕 허둥지둥 대처 속에 미국 사회의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다.

망가진 의료체계는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을 부풀리는 최악의 요인으로 꼽힌다. 검사를 받으려면 복잡한 절차와 길고 긴 대기 라인이 기다리는 현실, 의료진과 의료장비의 부족으로 제때 치료를 못 받고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 수천∼수만 달러의 치료비를 각오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감염 자체만큼 공포스럽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이웃은 “지금은 병원에 가도 치료를 못 받으니 다른 병으로 아프면 절대 안 된다”며 건강을 신신당부했다.

경제가 받는 충격파의 강도도 상상 이상이다. 주간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사상 최대인 328만 건으로 치솟으며 말 그대로 그래프를 뚫어버리다시피 했다. 실업자 수가 곧 14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암울한 추산치가 나온다. 아시아나 유럽에 비해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의 경우 회사에서 잘리면 순식간에 금융채무 불이행자에 홈리스가 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허약한 사회안전망의 구멍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회 곳곳의 뇌관들은 또 어떤가. 경제 불황이 심화되면서 도시 곳곳에 폭동이 벌어지고, 인종차별주의와 증오범죄가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열려 있다. 고립과 단절 속에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섣부른 통제 완화 조치에 나설 경우 되레 상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 앞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

전대미문의 ‘팬데믹 위기’ 앞에서 미국은 이처럼 속수무책이다. 전쟁을 겪으며 쌓아온 전시 전략이 무용지물이다. 미국학을 연구해온 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예상보다 너무 참담하다”는 반응과 함께 “코로나19 이후 미국의 쇠퇴가 본격화할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전망까지 나온다. 감염병이 21세기 글로벌 체제의 지형까지 바꿔놓고 있는 결정적인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팬데믹#의료체계#경제 불황#인종차별주의#공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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