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과 잔풍 사이… 대선주자 유무가 승부 갈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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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변수 ‘불복의 정치학’

18대 총선 때 친이(친이명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탈락한 서청원(가운데) 등 친박(친박근혜)계 인사들이 2008년 3월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친박연대’로 선거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DB
18대 총선 때 친이(친이명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탈락한 서청원(가운데) 등 친박(친박근혜)계 인사들이 2008년 3월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친박연대’로 선거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DB
“인간적으로 섭섭하다. 컷오프(공천배제) 대상이란 말(통보)도 없었는데…. 준비할 시간은 줘야 할 것 아니냐.”

미래통합당 4·15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뒤 23일 국회 기자회견장에 선 이은재 의원(서울 강남병)은 감정이 격해진 듯 말을 잘 잇지 못했다. 통합당의 컷오프는 이 의원의 반발 전까지만 해도 ‘조용한 물갈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조용히 전화를 해 용퇴를 설득하는 식의 특유의 ‘스텔스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원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공천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공관위를 비판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윤상현 의원은 28일 무소속 출마(인천 미추홀을)를 선언했고 이혜훈 의원 등의 탈당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시스템 공천’을 모토로 공천을 진행 중인 더불어민주당에선 컷오프당한 4선의 오제세 의원(충북 청주서원)이 무소속 출마를 불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자신을 컷오프하고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보좌관 출신인 이장섭 전 충북 정무부지사를 경선 후보로 올린 것에 대해 “노 실장이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 시스템 공천이 단번에 날아갈 일”이라는 메시지까지 동료 의원들에게 돌리며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

현역 의원을 잘라내는 컷오프를 둘러싸고 역대 총선 어느 때나 거센 반발이 있었다. 김윤환 전 한나라당 고문과 서청원 의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까지 모두 ‘불복의 계보’를 이을 정도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불복의 바람이 돌풍처럼 커지기도 했고, 또 다른 경우는 이내 잔풍(殘風)으로 잦아들기도 했다. ‘불복의 정치학’은 이번 총선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까.

○ 민국당의 실패와 친박연대의 성공

공천에 불복한 다수 의원이 세력을 이뤄 탈당한 뒤 신당 창당을 감행할 경우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종종 미풍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김윤환 신상우 이기택 등 영남권 다선 중진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키며 현역 의원 30여 명 물갈이를 단행했다. 당대의 킹메이커인 ‘허주’ 김윤환 당시 고문은 이 총재를 1997년 대선 후보로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허주는 “이회창이가 나를 배신했다. 비정한 ×이다”라며 격노했고, 영남 중진들이 이에 가세했다. 김 고문은 신상우 국회부의장, 조순 명예총재, 이수성 전 총리 등 대권 주자들과 함께 탈당한 뒤 장기표 등 재야 인사까지 규합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영남권을 기반으로 16대 총선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대체한다는 장기 전략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민심은 ‘흘러간 물’을 잡지 않았다. 민국당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공천 학살”이라고 비판했지만 유권자들은 공천 개혁으로 받아들였다. 민국당은 3.7% 득표율로 단 2개의 의석(전국구 1석)만 얻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탄생한 신당은 양상이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 1년 차 때 친이(친이명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서청원 홍사덕 김무성 등 친박(친박근혜)계는 대거 탈락했다. 친박 좌장인 서청원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인사 10여 명을 이끌고 탈당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름을 내세운 신당,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친박연대에 합류하지 않은 김무성 김태환 유기준 의원 등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형성한 뒤 친박연대와 함께 여당 밖 범박근혜 세력을 형성했다. 측근들이 공천에서 속속 탈락하는 와중에 홀로 대구 달성에 공천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은 회심의 메시지를 남긴다.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탈당파는 이 메시지를 담은 플래카드를 선거유세 차량에 걸고 유권자들에게 어필했고 친박연대는 14석을, 친박 무소속은 12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박근혜는 정권을 잡은 이명박 공천 학살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들고, 박 전 대통령 특유의 ‘메시지 정치’까지 더해진 결과다.

민국당과 친박연대 모두 영남권을 기반으로 급조된 정당이란 점은 같지만, 영남권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차기 대선 주자의 ‘백그라운드’ 유무가 성패를 갈랐다. 민국당엔 중진 정치인은 많았지만 확실한 대선 주자는 없었고, 친박연대엔 박근혜라는 압도적인 차기 대선 주자가 후원하면서 ‘불복의 정치’를 ‘정당방위’로 연결지었다.

○ 이해찬의 탈당과 김성식의 탈당

집단 불복과는 달리 개별 탈당과 무소속 출마는 거대 정당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버거운 싸움이다. 하지만 인지도가 높고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들은 홀로 불복의 정치에 나서 성공하기도 한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친문(친문재인)과 친노(친노무현)를 가리지 않고 물갈이의 칼날을 휘둘렀다. 이해찬 대표, 문희상 국회의장,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정청래 전 의원 등이 모두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 대표는 김 대표를 겨냥해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며 세종시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젊은 유권자가 많은 세종시에서 이 대표는 민주당 문흥수 후보를 꺾고 7선에 성공했고, 김 대표가 물러난 민주당으로 돌아와 당권까지 거머쥐었다. 이 대표는 당시 “김 대표의 잘못된 정무적 판단보다 세종시민의 판단이 훨씬 현명하고 옳았다”고 말했다.

문 의장도 당시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 출마를 시사했지만 “선당후사(先黨後私)를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며 수용했다. 그러나 마땅한 대체 후보를 찾지 못한 민주당은 공천규정까지 바꿔가며 문 의장을 다시 공천했고, 문 의장은 경기 의정부갑에서 6선에 성공했다. 이 대표와 문 의장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각각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면서 형성된 인지도 등을 무기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초재선급엔 ‘이해찬 문희상 케이스’를 마냥 기대하기 어렵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소장파 김성식 정태근 의원은 당 혁신 주장을 박 전 대통령이 즉각 수용하지 않자 탈당해 1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들의 탈당은 ‘공천 불복’과는 결을 달리하고 있었고, 실제 당내에선 “당 쇄신을 위한 희생”이라는 평가도 많았다. 박 전 대통령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이들 지역구(서울 관악갑, 성북갑)에 후보를 내지 않으며 두 후보를 지원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한국 정치사에 이런 다양한 유형의 불복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각 정당의 의사결정 및 공천 과정이 불투명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탓이란 지적이 많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정치학)는 “공천 과정의 정확한 기준이나 원칙을 사전에 모두가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해야 불복의 정치가 줄어든다”며 “공천 기준을 각 당의 당헌·당규에만 맡기지 말고 아예 선거법으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성열 ryu@donga.com·윤다빈 기자
#4·15총선#미래통합당#친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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