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조선말 배운다고? ‘개소리’는 빼고 ‘만세’부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1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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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10일

플래시백

“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데다가 가는 곳마다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동아일보 창간기자로 활약했던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한 대목입니다. 생번과 요보, 두 단어가 익숙지 않습니다. 생번은 교화되지 않은 야만인이라는 뜻이고, 요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을 얕잡아 부르던 말입니다. 만세전 이후 한동안 잊고 있던 ‘요보’를 동아일보 ‘휴지통’에서 다시 보게 됐습니다.

1920년 4월 10일자에 실린 최초의 휴지통은 조선어를 배워 “진지 잡수셨습니까”까지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에게 ‘요보라는 개소리는 행여나 배우지 말았으면 어떨지’라고 돌직구를 던집니다. 지금까지 100년을 이어온 한국 언론사상 최장수 고정코너인 휴지통은 시작부터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에게 “개소리는 배우지 말라”고 일갈한 겁니다.

휴지통은 이어 ‘조선말을 배우려면 제일 먼저 만세라는 말을 투철하게 궁리하는 것이 제일 긴급하다’고 권합니다. 앵무새처럼 말만 배우지 말고 1년 전 3·1 만세운동이 왜 일어났는지를 곰곰이 되새기며 조선 사람들의 처지와 사상을 이해하고 배우라는 의미였습니다.

200자 원고지 2장 안팎에 불과한 짧은 글에 시대상을 반영하고 서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담아 큰 사랑을 받은 휴지통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요보’로 상징되는 조선인 차별을 다뤘습니다.

1920년 9월 5일자에는 만취한 일본사람이 “너 같은 요보 순사가 감히 일본제국 신민에게…”라고 막말하는 장면을 그렸고, 1923년 12월 14일자엔 ‘다전’이란 일본인 서점 주인이 조선인 부자(父子)에게 누명을 씌우며 “빠가(바카·바보, 멍청이)”, “요보”하며 욕하고 구타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1929년 10월 1일자 휴지통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에게 글을 가르쳐준 백제의 왕인 박사를 공경한다면서 조선인에 대해 함부로 ‘요보’, 좀 존경(?)하면 ‘요보상’, 조금 유순하면 ‘바카’, 조금 똑똑하면 ‘나마이끼(건방짐, 주제넘음)’라고 한다고 지적합니다.

첫 휴지통의 타깃이 된 미즈노 렌타로는 우리와 참 악연이 깊습니다. 1919년 8월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되는데 부임 직후인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함께 강우규 의사에게 혼쭐이 났죠. 1922년 6월 일본으로 돌아가 내무대신이 된 그는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진재(大震災) 때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악감정을 조장해 학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당시 재일 한국인 동경YMCA 총무로 동포들의 피해를 조사한 고 최승만 옹은 1982년 동아일보에 “일본인의 만행은 내무성과 경시청, 군부가 합작한 음모의 결과”라며 “특히 미즈노는 남대문역 폭탄 세례를 받은 적이 있어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과 복수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은 바로 이때의 비극을 소재로 삼았는데 미즈노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인우는 한동안 밉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해 고생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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