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진작 이랬다면 ‘82년생 김지영’이 있었을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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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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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방안에 갇혀있던 한국 여성들을 대문 밖으로 불러낸 강력한 자극제였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칠 때는 남녀 사이의 장벽도 노소의 차이도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3·1운동 때 여학생이 일제 경찰에 맞서 용감하게 만세를 부르다 팔이 잘리는 등 많은 여성들의 영웅적 행동은 남녀차별이라는 인습의 틀을 해체시키는 강력한 힘이 됐습니다.

작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33화’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의 처절한 만세항쟁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습니다. 19세의 꽃다운 여학생이었던 윤형숙은 3월 10일 만세시위에 나섰고 일제 기마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왼팔을 잃었습니다. 윤형숙은 성한 오른손으로 왼팔이 움켜쥐고 있던 태극기를 빼들고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 경찰이 취조를 할 때도 윤형숙은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라고 꼿꼿하게 버텼습니다. 그가 ‘광주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배경이었죠.

물론 하루아침에 우리 여성들이 깨우치고 남성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 리 없습니다. 1919년 중국과 만주 등에 있던 여성들이 조직한 대한부인회가 4월 선포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만 봐도 과거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언서는 ‘뜻이 있는 남자들은 각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들은 그 중에 눕고 일어나면서 무지몽매하고 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이나’라고 표현합니다. 아직 스스로를 낮게 보는 관성이 뚜렷하죠.

박인덕 여사
박인덕 여사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자에 실린 박인덕의 기고 ‘현대조선과 남녀평등문제’는 남존여비의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주문이자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인덕도 ‘다수 여자들이 남녀평등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했다’고 인정하긴 합니다. 그러면서도 ‘학문을 배우고 인격을 갈고 닦아 남녀가 함께 전진하자’고 요청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박인덕이 당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신여성’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신여성이라고 하면 ‘양장’ ‘양산’ ‘모자’ ‘안경’ ‘뾰족구두’로 치장한 여성을 가리킵니다. 그때는 비녀를 빼버리고 머리를 자른 ‘단발 여성’까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 멋쟁이 신여성 중에 정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고 자유연애를 감행하거나 남의 후처나 첩이 돼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박인덕은 이런 부류의 신여성은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요구에 장애물이 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3·1운동 뒤 여자들도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된 건 아주 고무적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자 ‘변하여 가는 학생기풍’ 기사에는 백발의 시아버지가 쪽 찐 며느리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데려온 사례가 들어 있습니다. 도쿄에 유학 간 아들이 아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이혼하거나 첩을 얻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죠. 여성 교육과 인식 개선이 진작 이뤄졌다면 오늘날 ‘82년생 김지영’의 고생은 좀 덜어지지 않았을까요?

기고자 박인덕은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1916년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이화학당 교사로 근무하다 맞은 3·1운동 때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서대문감옥에서 4개월 간 옥고를 겪었습니다. 이때 제자였던 유관순의 순국을 목격했죠. 동아일보 기고는 대한독립애국부인회 등의 활동으로 두 번째 투옥된 이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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