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태극기 보고 놀란 일제, 떡 보고도 놀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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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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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나던 때 훗날 ‘딸깍발이’로 불린 국어학자 이희승은 경성직뉴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23세 청년 이희승은 만사를 제쳐놓고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연창하는 군중들, 또는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그러나 이희승이 50년 뒤인 1969년에 떠올린 그날의 모습은 상상이 빚어낸 기억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날 서울에서 태극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죠. 고려대 권보드래 교수는 “당대의 문자나 시각자료에서, 즉 신문조서나 사진 등에서 이 날짜에는 태극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희승은 나흘 뒤인 3월 5일 남대문 앞 만세시위를 위해 전날 밤을 새우며 종이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이희승의 3월 1일 기억은 4일 뒤의 사건과 합쳐져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아주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태극기는 만세시위의 필수 품목이 됐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일본으로 가던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 박영효가 만든 도안을 토대로 만들었고 1883년부터 조선의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10년 간 공공연히 꺼내들 수 없었던 ‘금기 품목’이 됐죠. 3·1운동을 계기로 이 태극기가 당당하게 다시 등장해 전국 방방곡곡을 수놓았습니다.

일제는 3·1운동에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랐습니다. 이제 태극기와 독립만세라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솥뚜껑) 보고 놀라는’ 심정이 됐죠. 1920년 3월 말 서울에서 태극무늬가 그려진 전차를 헐레벌떡 쫓아가는 일제 경찰이 그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색깔떡 위에 그려넣은 태극무늬까지 칼로 찍어내 버릴 정도였으니 이만저만 예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28년 5월 11일자 2면에 실린 휴지통에도 ‘태극기 떡’ 얘기가 나옵니다. 첫 줄이 ‘경성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실에 태극기 한 개가 압수됐다’였습니다. 새삼스럽게 태극기가 웬일인가 하겠지만 알고보면 우스운 얘기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색떡장수가 흰떡 바탕에 색떡을 새겨넣고 깃대와 기봉우리까지 만든 ‘먹는 태극기’였던 것입니다. 고등계 형사가 이런 태극기까지 압수해 간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197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71~76세의 창간 기자와 사원 5명이 ‘창간 전후를 말한다’를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창간 직후 안국동에서 순사가 한 부인의 떡함지에서 태극모양 떡을 발견해 검문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좌담회의 화제에 올랐죠.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옛 일을 회고했을 때도 태극떡 검문이 거론됐던 것입니다. 그만큼 일제의 지독한 단속은 원로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분들의 눈에 일제의 ‘태극 단속’은 해도해도 너무하는 작태로 비쳤던 것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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