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우리의 독립사상 애국정신은 피와 뇌에서 나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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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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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난 뒤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연방론, 자치론, 조선통치개혁론, 조선통치론 등이 그것입니다.

장덕준 기자
장덕준 기자
논설반원이자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으로 활약했던 추송 장덕준(1892~1920)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부터 13일까지 10회에 걸쳐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칼럼을 연재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자중자애하며 힘을 키울 것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소요(騷擾)란 사전적으로는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남’이라는 뜻이지만, 1919년 일어난 3·1운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장덕준은 ‘평양일일신문’ 기자를 하다 1915년 일본 유학을 떠나 3·1운동을 맞기까지 현지에 머물러 일본어와 일본 학계 사정에 정통했습니다. 또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비분강개 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폐병이 깊었던 장덕준은 흥분하면 책상을 치며 분개해 피를 토한 일도 있었고, 논설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 격렬해지면 책상을 집어던지며 “이 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고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런 성격이었으니 일본 어용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장덕준은 서론에서 일한의 병합은 일본 민족에게는 국운의 성쇠에 관한 문제이지만, 조선 민족에 대해선 존망(存亡)의 문제라고 전제한 뒤 대표적인 두 일본 학자의 논문을 분석했습니다. 교토제국대학 법학교수 스에히로 시게오(末廣重雄)가 1919년 7월 잡지 ‘태양’에 게재한 ‘조선자치론’과 같은 대학 법학교수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가 1919년 11월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신문’에 기고한 ‘조선통치론’이 그것입니다.

스에히로 교수는 3·1운동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국 선교사의 사주(使嗾)나 천도교주 손병희의 음모가 아니라 도(道)를 상실한 일본의 통치, 즉 총독의 무단정치와 조선인 차별대우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를 쓰고, 일본인과 같은 교육을 받도록 하는 등 동화정책을 펴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성공한 예가 없으니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지요. 이에 대해 장덕준은 스에히로 교수에 대해 ‘공정한 비평가’라 말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독립의 능력이 없는 조선인에게 독립을 허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선의 자치만 허용하면 다수는 만족하리라 생각한다’는 등의 논리는 결코 수긍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장덕준은 오가와 교수의 조선통치론에 대해서는 서릿발 같은 비판을 가하며 그 허구를 하나하나 까발렸습니다. 그는 ‘조선에는 다수의 무식자가 있으며, 다수한 무식자는 독립의 이상이 없다’고 한 오가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응합니다.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혈액과 뇌수에 의해 발생한다. 결코 소수 야심가와 선동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선각자와 유식자를 단속, 압박하더라도 조선혼과 독립사상은 추호도 타격받을 리 없다.’ 그는 또 일제의 기만적인 ‘일시동인주의(一視同仁主義·일본인도, 조선인도 같은 황국신민이니 차별 없이 다룸)’에 대해 강자와 약자를 평등한 처지에서 자유경쟁하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며 조선인의 저항을 융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장덕준은 친동생인 설산 장덕수와 함께 100년 동아의 주춧돌을 놓았지만, 너무나도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만주 훈춘(琿春)에서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현지로 달려가 취재하다 한국 언론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고 맙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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