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노동의 응축, 멸치액젓[김창일의 갯마을 탐구]〈39〉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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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밑반찬은 물론이고 젓갈, 액젓, 분말 등 감칠맛을 내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식재료. 우리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이 있을까? 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맛의 주연이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멸치를 추어(추魚), 멸어(蔑魚)라 했다. ‘업신여길 멸(蔑)’ 자에서 알 수 있듯 변변찮은 물고기로 여겼다. 국이나 젓갈 또는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썼다. 물고기 미끼로 사용했으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멸치를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 구이로 먹고 건조하거나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했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역시 멸치는 모래톱에서 건조시켜 판매하는데 우천으로 미처 말리지 못해 부패하면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멸치를 다양한 식재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멸치는 남해안의 대표 어종이다. 방어, 삼치, 고등어 등 큰 물고기의 먹잇감으로 해양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크기에 따라 대멸, 중멸, 소멸, 자멸, 세멸 등으로 구분하는데, 지역에 따라 세분하거나 단순화하기도 한다. 유자망으로 잡은 대멸은 주로 멸치액젓을 만들지만 회무침, 구이, 찌개로 먹기도 한다. 부산 대변항과 경남 남해군 미조항이 멸치 유자망 어업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연예인들이 유자망 어선을 타고 멸치잡이 체험을 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몸으로 하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개그맨이 출연했다. 멸치잡이배를 타고 선원 체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멸치 털이를 하는 도중 갑자기 포기 선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달인인 척하는 놈이 진짜 달인을 만났다. 작업 속도를 못 쫓아가니 계속 피해만 드리는 것 같아서 선원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정말 존경스럽다”고 되뇌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세계 곳곳의 정글과 극한 환경에서 생존을 펼쳐온 그의 입에서 ‘포기’라는 말이 나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그만큼 멸치 유자망 어업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10시간을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입항하자마자 2km에 달하는 그물에 걸린 멸치를 사람의 힘만으로 털어 내야 한다.

멸치는 상온에서 빠르게 부패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 없이 온 힘을 다해서 2, 3시간 멸치 털이를 한다. 너무 힘들어 한국인 선원들은 이를 기피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운 지 오래다.

필자는 조사를 위해 유자망 어선을 여러 번 탔다. 권현망, 양조망, 정치망 등 또 다른 멸치잡이 어선을 탈 때와는 사뭇 다른 심정이 된다. 유자망은 멸치어군의 길목에 투망하여 지나가던 큰 멸치가 그물코에 꽂히게 하는 어법이다. 잡은 멸치를 싣고 항구에 도착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물을 털어서 멸치를 떼어낸다. 멸치 비늘은 사방으로 튀어 얼굴과 몸은 순식간에 은색으로 변한다.

그렇게 털이가 끝나면 선원은 지쳐 말이 없다. 이렇게 잡은 대멸로 액젓을 만든다. 멸치액젓은 선원들의 땀이 만들어낸 응축액이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멸치#남해안#멸치액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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