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와 양치기의 시간… 공부가 슬픈 이유[광화문에서/김희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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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부엉이, 러셀, 247.’

이 암호를 단번에 풀었다면 이 글을 그만 읽는 게 좋겠다. 본인이나 자녀가 대학 입시 준비에 한창일 가능성이 높다. 즐거워야 할 명절을 앞두고 괜히 심란해질 우려가 있다.

세 단어를 이리저리 뜯어봐도 연관성을 모르겠다면 좀 편안한 마음으로 더 읽어도 좋다. 저 단어들은 서울 강남, 목동 등지에 있는 관리형 자습실 혹은 자습실 제공 학원의 이름이다. 이곳 학생들은 강의실과 자습실만 오가고, 자습실 좌석에서 급식까지 받아먹으니 돌아다닐 일이 없다. 휴대전화는 반입 금지요, 공부에 지쳐 잠시 쪽잠이라도 잘라치면 관리자가 바로 깨운다. 직원이 돌아다니면서 학습 태도를 감독하는 곳도 있어서 부모들이좋아한다. 대학을 꿈꾸는 아이들은 그저 부엉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하루 24시간 1주일에 7일 내내 강의 듣고 급식 먹고 자습하면 된다.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는 과목별 1타 강사가 누구인가, 누가 문제풀이 요령을 잘 가르치는가, 누가 예상 문제를 기가 막히게 뽑아내는가로 수렴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사전적 정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건만, 현실적 정의는 문제풀이 기술이 중요한 시험이 된 지 오래다. 최근 만난 유명 수능 국어 강사는 “요즘 수능 국어는 솔직히 나도 못 풀겠다. 이건 풀라고 내는 게 아니라 틀리라고 내는 것”이라며 “특히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 뒤부터 다른 과목에서는 점수 차를 두려고 교과 지식이 아니라 문제 푸는 요령을 요구하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자, 이렇게 밤을 새워 대학에 가면 조류(부엉이) 신세를 면하는가? 이제는 인간으로 거듭나는가? 물론 그렇다. 다만 인간이긴 하나 양치기가 될 뿐이다. 양치기라는 단어에 동화책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부터 떠올렸다면 옛날 사람이다. 요즘 양치기란 시험 문제를 엄청 많이 풀어서 성적을 높이는 것, 그야말로 양으로 승부를 보는 수험 방식을 말한다. 대학에 가자마자 취업 준비 레이스를 밟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토익 양치기, 인·적성시험 양치기인 것이다. 그렇게 양을 치고 또 쳐서 취업에 성공하면 다시 승진 시험 양치기가 기다리기 마련이다.

성장 과정에서 매사에 노력을 하고 점수를 올리는 것은 필요하고 가치 있다. 다만 이것이 무엇을 위한 노력인가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공부에도 육하원칙이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공부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공교육 현장에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탐구하고 체험하면서, 더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이상적일 거다. 하지만 현실은 사교육 현장에서, 문제풀이 스킬을 얻기 위해, 양치기를 반복하면서, 다음 양치기 단계로의 진입에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번 설 연휴에도 수많은 청춘이 부엉이와 양치기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미 짜인 교육과 일자리의 공고한 판형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청춘들에게 그저 “잘될 거야”라는 말밖에 건넬 수 없어서 미안하다. 이들의 노력이 언젠가는 미네르바의 부엉이(Eule der Minerva) 같은 지혜와 양을 모는 목자(牧者) 같은 평온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대학입시#설 연휴#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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