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영화 속 공주 때문? 마클 英 왕손빈을 위한 항변[광화문에서/김윤종]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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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종 파리특파원
김윤종 파리특파원
8일 영국 해리 왕손(36)과 메건 마클 왕손빈(39) 부부가 영국 왕실에서의 독립을 선언한 후 세계 언론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를 집중 보도하고 있다. ‘상징적 의미만 남은 영국 왕족의 배부른 투정이 뭐 그리 중요할까’라고 생각했던 필자 역시 관련 소식을 찾는 게 주요 일과가 됐다.

보도의 홍수 속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마클 왕손빈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보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19일 해리 왕손이 “이번 결정은 왕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내를 위해서였다”고 밝히자 마클 왕손빈에 대한 부정적 기사는 극에 달했다. 한마디로 ‘멀쩡하게 잘 살던 왕자가 아내를 잘못 만나 변했다’는 투다.

부부의 속사정이야 어떻든 유럽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월트 디즈니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디즈니 만화 속 순종적 공주’에 익숙해져 마클 왕손빈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현실의 공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영국 왕실을 망친 주범은 디즈니 공주라고 보도했다.

1937년 디즈니의 세계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등장한 후 대중이 인식하는 공주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긴 머리와 하얀 피부 등 여성성을 한껏 강조한 외모, 주변 사람에게 헌신하는 태도, 착한 공주를 괴롭히는 계모와 마녀 및 악독한 여왕 등 천편일률적인 빌런(악당) 캐릭터, 백마 탄 왕자의 등장과 둘의 행복한 결혼…. ‘유리구두’의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로라 공주도 비슷하다.

여성학자들은 디즈니 만화가 워낙 오랫동안 전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다 보니 대중은 순종적 공주형 여성상에 긍정적 감정을 느끼게 됐다고 분석한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마녀형 여성상에는 무의식적으로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00% 백인이 아닌 흑백 혼혈, 이혼 경력, 부유한 부모와 든든한 배경을 갖추지 못한 마클 왕손빈은 ‘공주’보다 ‘마녀’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마클 왕손빈의 처지가 된다면 답답하고 고루한 왕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언론과 대중에게 시시각각 사냥감처럼 포착되는 삶이 뭐 그리 좋을까. 아무리 부와 화려한 생활을 누린다고 해도 말이다.

디즈니가 반성한 것인지,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 열풍이 부는 시대에 맞춘 상술인지는 모르겠으나 ‘만화 속 공주’도 바뀌고 있다. ‘겨울왕국’의 여주인공 엘사에겐 얼음에서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가 없다. 엘사는 스스로 왕국을 구하고 여왕에 오른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 공주도 왕자들보다 뛰어난 활 솜씨를 자랑하고 ‘정략결혼 불가’를 선언한다. 요즘 6, 7세 여자 어린이들은 ‘인어공주’의 에리얼을 보면서 “고작 왕자 하나 때문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포기하고 물거품이 되느냐”며 혀를 찬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고 여성관이 바뀌고 있다. 현실 속 공주도 달라져야 할 때가 아닐까. 해리 왕손 부부의 왕실 탈출기를 보면서 ‘내가 과도한 고정관념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사람은 아닌지’를 한 번쯤 돌아봤으면 한다.
 
김윤종 파리특파원 zozo@donga.com
#해리 왕손#메건 마클#디즈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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