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논 트로포’ 정책[오늘과 내일/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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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최저임금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민생 문제는 이념 아닌 현실에 속도 맞춰야

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3대 모토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다. 그중 소득주도성장이 간판 격이다. 이를 추진할 3가지 수단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다. 최저임금은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의 3배가 넘는 9% 이상씩 올렸다가 내년에는 2.9%로 낮췄다. 정규직화는 공기업에서 출발해 민간기업으로 확산한다는 전략이었는데 당초부터 직접 전환이 아닌 자회사 형식 전환이라는 완충장치를 가지고 갔다. 민간기업으로의 확대는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이번에 정부가 내년 1월 1일부터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하려던 것을 사실상 1년 유예했다. 특별연장근로요건도 재난, 사고 재해에 국한돼 있던 것에서 경영상 사유를 포함시켰다. 소주성 3가지 수단 가운데 남은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속도조절을 한 것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현장을 파악한 결과 중소기업들이 준비가 안 돼 있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경총과 중소기업중앙회는 불완전한 땜질 처방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민노총은 최저임금 1만 원에 이어 근로시간 단축도 포기한 문 정권 노동정책에 대해 총파업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아쉽고 불만스럽겠지만 속도조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현실적 여건이 안 돼 있는데 공약이라고 밀어붙였다가는 제2의 자영업 대란이 일어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명분과 체면은 정치에서 찾고 민생이 걸린 경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실리와 현실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야 시속 100km, 200km 달리고 싶어도 도로 사정이 안 좋거나 바깥에 눈비 쏟아지면 속도를 늦추는 게 올바른 이치다. 국내 경기는 이미 하강 사이클이고 세계 경기는 꽁꽁 얼어붙어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려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불평등의 대가는 경제적 약자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가 치러야 한다는 걸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시위들이 보여준다.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적 노력은 당연하다.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요컨대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이나 모두 정책의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속도와 방법이 문제였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설계했으면 좋을 뻔했다.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속도를 늦춘 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적절한 선택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최근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을 예로 들면서 “저소득층 소득을 올리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인데 그것이 경제성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다. 설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비록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석학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김 교수는 그러면서 “개념이나 이념을 하나의 가설로 생각하고 현실에 맞춰 시험하며 끝없이 수정해 달라”고 당부한다.

청와대는 임기 절반을 돌았으니 이제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한다. 성과는 심은 만큼 나온다.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하면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학교 다닐 때 음악 시간에 한 번쯤 들어봤을 용어 가운데 ‘마 논 트로포(Ma Non Troppo)’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란 뜻이다. 예를 들어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라면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란 의미다. 사자성어로 하자면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세상 이치가 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마 논 트로포#주 52시간#최저임금#소득주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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