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힘이 세다[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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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이비드 린치의 ‘스트레이트 스토리’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감독이 데이비드 린치가 맞나 거듭 확인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원래 오싹하도록 기괴한 영화 전문인데 시침 떼듯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내놓았기에.

74세의 앨빈은 시력 감퇴로 운전도 못 하고, 관절염으로 2분 이상 서 있지 못하는, 지팡이 두 개가 있어야 몇 걸음을 간신히 옮기는 신세다. 다툼으로 10년간 연을 끊은 형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궁핍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묘를 짜내 병문안을 간다. 1994년, 잔디 깎는 기계를 타고 미국 아이오와의 시골에서 위스콘신의 산속까지 400km를 느리게 달린 앨빈 스트레이트의 실화다.

자신과 닮은 33년 된 고물 잔디깎이에 식량과 세간을 실은 수레를 달고 느릿느릿 국도를 달리는 할아버지. 카메라도 그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여정을 담는다. 정작 살면서 필요한 건 몇 가지 없다는 듯,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여장(旅裝)은 그의 삶과 닮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평 대신 우직하게 조금씩 전진하는 노인의 모습은 느려서 아름답고, 단순해서 부럽고, 가난한데도 폼이 났다. 형에게 미안한 진심을 전하고 싶어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폭우 속에서도 노숙을 고집하며 6주 만에 형의 집에 도착하지만 10년 만인 형제는 화해는커녕 인사말도 생략한다. 단지, 나를 보러 저 기계를 타고 왔냐는 형의 물음과 눈가에 천천히 고이는 눈물이 다 말해준다.

주인공을 맡은 79세의 리처드 판즈워스는 촬영 당시 말기 암 환자였지만 80년 삶이 응축된 생애 최고의 연기를 선보여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40년 넘게 스턴트맨만 하다가 60세가 되어서야 대사가 있는 조연을 맡았고, 약 20년 후에는 최고령으로 첫 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걸 보면 그의 인생도 앨빈의 여정처럼 천천히, 하지만 누락 없이 정진해온 셈이다.

신이 나를 20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지금의 내 머릿속도 가져갈 수 있는지, 아니라면 사양할 것이다. 젊었을 때의 나는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였다. 치기와 패기가, 지식과 지혜가, 오지랖과 배려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베란다에 와서 매일 똥을 싸대고 이것저것 쪼아 먹는 비둘기를 혼내겠다고 벼르시더니 사람이 다가가도 멀뚱히 있는 비둘기를 품에 안았다. 몇 초 후 놔줬을 뿐인데 비둘기는 그 후로 모범생이 되었다.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노인을 보면 경외감이 든다. 나도 20년 후엔 저런 눈빛을 지닐 수 있을까? 나라 잃은 설움과 전쟁과 극도의 가난을 성실히 견뎌낸 그들의 나이테를 나이만 든다고 흉내 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기로 했다. 노년의 목표다.
 
이정향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스트레이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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