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지소미아 진퇴양난 자초한 무지와 독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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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이어 또다시 진퇴양난 처한 文
지소미아 폐기하면 한미동맹 상처 불가피
아베만 웃게 만들 폐기 번복도 어려워
안보외교 문외한들이 둔 敗着에 동맹과 안보, 국가 자존심 위협받는 상황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지소미아는 한일(韓日)이 풀어야 할 문제로 한미동맹과 전혀 관계없다”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발언은 정부 외교안보팀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왜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한마디다.

정 실장의 발언은 좌파진영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그 논리는 대체로 두 개로 구성된다. 즉, <① 지소미아는 한일 간 문제이고 주로 일본이 혜택을 본다. 우리에게 보복을 한 일본에게 더 이상 선물을 줘선 안된다 ②지소미아는 2016년 체결됐는데, 지소미아가 없을때도 우리 안보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게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지에서 비롯된 피상적 논리다.

①번부터 살펴보자. 물론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한일 지소미아는 한일 간 약속이다. 하지만 미국이 나서서 동북아 지소미아 체제가 완성한 뒤 한미일 안보 협력의 상징이 됐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연결고리가 됐다. 한국이 일본과 다투다가 지소미아를 꺼내든 순간 한미 간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이 지소미아 폐기를 꺼낸 것은 미국을 자극해서 우리 측 역성을 들게 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텐데, 동맹외교를 전혀 모르는 아마추어들의 오판이었다.

워싱턴 소식통은 어제 통화에서 “미국에서는 한국의 태도에 대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도발을 통해 미국이 반응하게 만드는 북한의 브링크맨십(벼랑끝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이 있다”고 전했다.

체결 전에도 안보에 별문제가 없었으므로 지소미아는 없어도 된다는 ②번 논리도 말장난이다. 한일 지소미아는 한국이 1989년 일본에 첫 제안했지만 진전이 없다가 2000년대 중반 북한 핵실험 여파로 일본이 한국에 제안해 2012년 국무회의에서 의결됐고, 절차문제로 체결이 보류되었다가 2016년 11월 정식 체결됐다. 즉 북핵·미사일 실험이 본격화되고 동해상 발사가 다반사로 벌어지면서 정보 교류 필요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커져온 것이다.

물론 지소미아를 통해 한일 간에 오가는 군사 정보가 국가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그런 수준은 아니다. 지소미아가 없다고 해서 당장 큰 장애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는 일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본에 카운터펀치로 지소미아 폐기를 꺼냈으나 상대에게 주는 타격은 별게 없고, 괜히 한미동맹을 때려버린 셈이다.

워싱턴 소식통은 “지소미아가 이대로 폐기되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뢰와 커미트먼트(commitment·약속, 헌신)가 약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방위비, 무역협상 등 여러 전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구나 지금 한반도의 명운이 달린 북핵 문제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과 재선에만 골몰하는 트럼프 혼자 주무르고 있고, 북한은 한국을 상대도 안 한다. 미국과의 신뢰마저 깨지면 우리 이익을 설득할 통로마저 사라진다.

아무리 좌파진영이 지지기반인 정권이라 해도 한미동맹을 악화시킨 채 정상적으로 나라를 끌고 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일부 좌파인사들은 한미동맹이 약해진다 해서 실제로 피해를 볼게 뭐 있느냐, 전쟁이 나겠느냐는 주장도 한다. 매우 단선적인 생각이다.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주한미군 철수 운운하는 소리만 나와도 한국 내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고 투자를 기피하고, 관세 등 무역관계는 더 빡빡해진다. 안보동맹은 국민의 일상과 경제 안정성을 담보하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폐기결정을 번복하기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일본이 아무 성의 표시도 안 하는 상태에서 아베에게 완승을 안겨주는 모양새가 된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문대통령으로선 어떤 선택을 하든 후폭풍이 불가피한 처지인 것이다.

탈출구가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일정 기간을 정해 한국은 지소미아를 임시 연장하고 일본은 수출통제 조치를 임시 중단하되, 일정 기간 내에 타협을 이루지 못하면 지소미아 폐기와 수출통제로 원상복귀(스냅백)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남은 시간과 일본의 태도로 보아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8월 22일 의기양양하게 지소미아 폐기를 결정할 당시 결정 참여자들 가운데 이런 진퇴양난을 예상한 이가 있었을까.

국가안보실 정의용 실장, 김현종 2차장은 통상 전문가 출신이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역시 주특기가 안보외교는 아니다. 정권 핵심부의 기조에 영합하려는 성향이 강한데다 안보 문제는 문외한들로 구성된 외교안보팀, 동맹의 개념조차 모르는 386 참모, 대일 강경책이 지지율에 미칠 효과만 계산하는 여당 지도부 등의 합작품으로 지소미아 폐기가 결정됐다.

그들은 이처럼 거센 미국의 반발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무역협정은 맺었다가 폐지하고 또 만들고, 손익에 따라 언제든 밀고 당길 수 있지만 안보는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특히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주겠다는 약속인 동맹은 깊은 신뢰와 가치 공유 없이는 지탱할 수 없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에 이어 또다시 외통수 상황에 처했다. 통치자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실점을 할 수밖에 없는 곤궁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불과 수개월 사이에 패착을 연거푸 뒀다는 것은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를 시사한다.

논의 참여자들 전체가 동일한 가치관으로 일렬종대 한 채, 합리성과 전문성이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이념적 잣대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다 보니 그런 외통수 패착이 거듭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지소미아#한일관계#한미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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