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총리의 또 다른 도쿄 미션[오늘과 내일/이승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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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취재하듯 일본 경험한 이 총리
문재인 정부에도 지일파 있음을 알려야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일본인 첫 노벨 문학상을 안긴 소설 ‘설국(雪國)’의 유명한 첫 문장. 이낙연 국무총리가 섬세한 글쓰기의 중요성을 주변에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해 온 문장이다. 주장하지 말고 손에 잡히듯, 알기 쉽게 묘사하라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인지 이 총리가 처음부터 일본을 잘 알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총리가 일본을 알게 된 계기는 30년 전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으로 내정되면서다. 그때 이 총리는 일본어를 거의 못 했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해 영어를 더 잘했다. 사정이 급했던 이 총리는 어학원에서 일본어 수업을 초급반, 고급반 동시에 두 개를 끊었다. 문법을 배우다 갑자기 프리토킹하는 식이었다. 자극을 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고 한다. 맨땅에 헤딩하듯 일본어와 씨름한 지 6개월. 일본 국민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도쿄는 학원과 달랐다. 부임하고서 얼마 안 돼 선술집에 갔는데 메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메뉴별 특성, 술과의 궁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인에게 술집에서 알아야 할 안주 목록을 팩스로 받아 통째로 암기하기 시작했다. ‘이치닌마에(一人前·각자의 밥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하라는 뜻이기도 함)’ 등 식사 자리에 녹아든 일본 문화도 알게 됐다. 얼마 뒤부터 모임이 있으면 대부분 이 총리가 주문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총리는 정치인이 되고서도 종종 도쿄특파원 같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2002년 11월경. 그의 대변인이었던 이 총리는 노 전 대통령과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를 취재하러 온 일본 기자가 한국말로 묻자 일본어로 답했다. 일본 기자는 “저 한국말 잘합니다”라고 했지만 이 총리는 계속 일본어로 말했다. 결국 대화는 일본어로 진행됐다. 옆에 있던 필자는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일본을 잘 안다는 자기 과시보다는, 어렵게 일군 지일파라는 브랜드를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비슷한 걸 느꼈다. 요즘 이 총리가 일본 인사들과 대화하면서 일본어로 했다고 강조할 때도 이 장면이 오버랩된다. 이 총리는 굳이 구분하자면 타고난 ‘금수저 지일파’라기보단 ‘생계형 지일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총리가 22일 일본을 방문해 일왕 즉위식에 참석하고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는 게 확정된 뒤 다양한 관측이 나온다. 한일 정상회담의 초석을 놓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많지만 더 이상의 관계 악화를 막는 상황 관리에 그칠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 총리에겐 또 다른 미션이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에도 30년간 ‘전투적’으로 일본을 알고 경험하려 했던 지일파가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 사람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장의 성과를 내느냐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다.

한일 갈등이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전과는 너무 달라진 아베의 일본이 우선 문제겠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일본의 속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대일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지일파라는 이 총리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 이후 대일 문제의 수면 위로 등장하는 데 꼬박 1년 걸린 게 현실이다. 일본은 자신들을 잘 아는 사람을 내보내지 않는 문 대통령을 그 시간만큼 비딱하게 봤을 것이다. 이는 한미동맹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문재인 정부에 미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이낙연#한일 갈등#한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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