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힌 의료사고[횡설수설/이진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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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의 한 유명 여성병원에서 영양주사 처방을 받은 임신 6주의 임신부에게 낙태 수술을 하는 의료사고가 벌어졌다. 계류유산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하는 다른 임신부와 착각했다는 것이다. 영양제 대신 수면마취제를 맞은 피해자는 깨어난 뒤 계속 하혈을 해 병원에 문의했지만, 담당의사가 퇴근해 다음 날 다시 찾아와 검사를 했고 그때서야 아기집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병원 측도 경찰 조사에서 의료사고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황당하기 그지없다. 간단한 건강검진도 맨 처음 하는 게 본인 확인이다. 수면내시경조차 본인 확인은 물론이고 각종 알레르기, 앓는 질환, 마취 거부 반응 유무 등을 묻고 동의서를 받는다. 마취제 투여 시 이름만 물었어도 환자가 다르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수술의사가 환자의 진찰 차트만 봤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묻지도 않고 냅다 주삿바늘을 꽂고, 이후에는 누구 하나 차트 한번 보지 않고 컨베이어벨트 돌아가듯 일사천리로 수술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환자를 의료상품으로 보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은 올 3월 전국 의료기관에 환자안전경보를 발령했다. 황당한 의료사고가 2016∼2018년에만 333건에 달한 데 따른 것이다. 몸 안에 수술 도구 등 이물질을 놔둔 채 봉합한 사고가 48건, 다른 환자를 수술하거나 검사 및 수혈한 경우도 161건에 달했다. 수술 장비가 고장 난 줄 모르고 마취했다 수술을 연기하고, 유방암 검사에서 좌우를 잘못 기재한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조직검사에서 확인돼 바로잡았지만 하마터면 엉뚱한 유방을 절제할 뻔한 일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은 의료기관이 수술 안전 체크리스트를 마련해 수술명, 기구 개수 등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1차 마취 유도 전, 2차 절개 전, 3차 퇴실 전에 본인 확인, 수술 동의서, 수술 부위, 각종 장비 등을 확인하는 타임아웃(Time Out)이란 절차도 있다. 의료진도 실수할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 벌어진 참사를 실수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의 책임감이나 직업적 엄격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화장실 안에도 점검 리스트가 있어 청소를 하고 나면 표시를 하는 세상이다. 병원 측은 “뭔가에 씌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아야 할 부모의 마음, 어이없이 박탈당한 태아의 생명의 기회는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의료사고#낙태 수술#영양주사#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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