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하면 보관료 내는 세상 그래도 돈 맡기는 사람들[광화문에서/유재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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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세상 모든 일을 다 설명하려 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들이 두 곡선으로 설명하는 수많은 현상 중에는 물론 시장금리의 움직임도 포함돼 있다. 가령 은행 금고에 돈은 많은데 이를 대출해줄 곳이 없다면 금리가 내려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예금은 적은데 돈을 빌리려는 곳이 많으면 금리가 오르게 된다. 동네 시장에서 상품의 수급에 따라 물건값이 오르내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런데 화폐의 가격, 즉 금리가 계속 내려가다 못해 영(0) 밑으로 떨어졌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마이너스 금리’는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거의 없었던 현상이라 전문지식이 있는 학자들조차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가격은 0보다 크다’, ‘돈은 이자를 낳는다’는 기존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식당 메뉴판의 가격표에 ‘―’가 붙어있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돌고, 시냇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이처럼 동화 속 ‘거꾸로 세상’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의 정책금리나 예금금리는 마이너스의 영역에 진입한 상태다. 실제 이들 나라의 일부 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로 일반 소비자에게 대출을 내주기 시작했다. 만일 금리가 ―1%라면 100만 원을 대출받았을 때 만기에 99만 원만 상환하면 된다는 뜻이다. 유럽뿐 아니다. 일본도 금리가 0보다 낮은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금리가 제로 또는 그 아래로 가야 한다”며 중앙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이제 선진국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뉴노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하다.

그러면 마이너스 금리는 나쁘기만 한 걸까? 이자 생활자에겐 죽을 맛이겠지만 당장 돈이 필요한 기업이나 가계에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대출을 받으면서 이자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게 되면 화폐의 수요 곡선이 정상 궤도를 되찾아 경제는 다시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 유럽 등 주요국이 이처럼 전례 없는 극약 처방을 하는 것도 다 이런 시나리오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그런 기대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금리가 낮아졌다고 마음 놓고 돈을 갖다 쓰기보다 오히려 현금을 장롱이나 금고에 더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경기에 대한 비관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향후 경기가 안 좋아 금리가 더 내릴 것으로 본다면 당장 손실 볼 게 뻔한 채권에 투자하거나 보관료를 내가며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게 어쩌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금리가 아직 플러스 상태지만, 마이너스 금리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정책은 이미 써본 적이 있다. 기업 투자를 늘리고 가계 소득을 높이겠다며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쓰라고 부추기고 심지어 벌금을 매겨도 가계나 기업은 돈을 쓸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섣불리 지갑을 열지 않는다. 돈이 넘쳐나는데도 돈을 못 쓰는 진풍경이 이 시대에 펼쳐지고 있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저축#보관료#금리#마이너스 금리#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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