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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묻힌 곳은 태왕릉 아닌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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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묻힌 곳은 태왕릉 아닌 장군총”

조종엽 기자 입력 2019-08-21 03:00수정 2019-08-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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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릉 3곳서 나온 유물… 연꽃무늬 와당 비교 분석
“태왕릉은 광개토왕 때 개보수… 선대왕인 고국양왕 무덤일 것”
2017년 촬영한 중국 지안시 장군총.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출토된 와당을 분석해 장군총에 묻힌 이가 장수왕이 아닌 아버지 광개토대왕일 것이라고 논문에서 주장했다. 동아일보DB
출토된 와당(瓦當·지붕 기와 끝을 막는 막새기와)을 근거로 광개토대왕이 묻힌 왕릉이 태왕릉이 아니라 장군총일 가능성을 뒷받침한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공석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 최근호에 실은 논문 ‘연꽃무늬 와당으로 본 광개토왕릉 비정’에서 “여러 와당과 명문(銘文) 기와 등의 유물을 종합해 보면 광개토대왕이 태왕릉에 묻혔다고 보기 어렵다”며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안(集安)시에는 고구려 왕릉이 산재해 있다. 대중적으로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학계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태왕릉설과 장군총설이 경쟁하고 있다.

공 교수는 중국 측이 출간한 발굴보고서를 통해 출토 유물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먼저 지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다고 봤다. 천추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제작 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때라고 봤다. 광개토대왕이 천추총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영락’ 명문 기와와 이 와당을 함께 제작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이 기와에 등장하는 ‘未(미)’자를 간지로 보아 제작 시점은 광개토대왕 재위 17년인 407년(정미년)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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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태왕릉, 오른쪽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그림이다. 공석구 교수 제공
문제는 태왕릉에서도 이 와당과 문양의 구성 방식 등 모양이 거의 같은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공 교수는 “이는 천추총과 태왕릉을 비슷한 시기 개·보수했다는 뜻이고,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절인 ‘영락’ 연간에 개·보수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이 될 수 없다. 왕의 사후, 장례의 일환으로 왕릉이 건설됐다고 볼 때 살아있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무덤을 개·보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봤다.

그럼 광개토대왕은 어디에 묻혔을까. 이 역시 또 다른 와당에 힌트가 있다. 태왕릉과 장군총에서는 모두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 이 역시 서로 모양이 거의 같아 같은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장군총을 축조하면서 이 와당을 썼고, 할아버지의 무덤인 태왕릉 역시 이 와당으로 함께 개·보수했던 것”이라며 “결국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라고 밝혔다.

장군총에서 연꽃무늬 와당이 한 종류만 출토된 것 역시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장군총은 축조된 이후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실이 직접 제사를 받들기 어려워진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개토대왕#태왕릉#장군총#고구려왕릉#연꽃무늬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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