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의 민주주의는 괜찮은가[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민주주의는 국민 피 땀 눈물로 다져져
단기간 퇴행해도 회복탄력성으로 정상화
정치는 국민 열망보다 항상 뒤처져… 大義는 토론과 설득을 통해 이뤄져야
현재 정치를 대체할 새 인물과 판 필요해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일본의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 수준을 논의할 때 서로 당황하곤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2018년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는 각각 21위와 22위로 모두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에 속한다. 모두 충분한 민주주의를 누린다고 짐작했는데 한국은 정부의 기능성에서, 일본은 시민의 정치참여와 언론의 자유에서 저조해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순위는 비슷하나 그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의 질과 관련된 두 나라의 차이는 7월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하면서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한 대처 방식을 두고 정치권, 경제계, 시민사회 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되었고, 서로 다른 해법을 놓고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소 소란스럽기는 하나 정부, 기업, 시민의 대응과 해법에서 같은 듯 다른 기조를 유지하며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정부와 관료에 의한 정제된 입장 발표가 이어지면서 전반적으로 일관적 기조를 보여준다. 언론, 관료, 정치인, 기업인 사이에서 다른 시각이 활발하게 제시된 적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은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의 소란에서 희망을 본다. 시각의 차이와 다양성이 분출될 수 있는 문화가 창의성을 촉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활력 면에서 상대적 우위를 가지는 것은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국민의 ‘피, 땀, 눈물’이 있어서다. 이렇게 기초부터 다져진 민주주의는 단기간 퇴행할 수는 있어도, 회복 탄력성을 바탕으로 정상화된다.

하지만 극일이라는 대의(大義)를 부여받은 정부와 여권의 민주주의 운용 방식에서는 철학의 빈곤을 본다. 반대 목소리를 친일로 묶어 이들의 정당성을 박탈하고 토론과 설득을 망각하고, 정작 자신들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실업과 고용, 재분배와 사회정의, 복지 정책의 후퇴에 앞장서는 모습에 절망한다. 가진 것 없는 국민이 다 가진 재벌을 걱정하는 아이러니를 이용해 오랜 기간 토론과 설득을 통해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의 버팀목들을 거둬들이는 과거의 민주투사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주 52시간 노동 준수 같은 노동권 후퇴와 현장의 기본적 안전 확보를 위한 규제의 철폐가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 시급한 사안이었다면 지금까지 토론에 부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부총리가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 같은 분야에서 예외를 검토하겠다는 모습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얕은 이해를 확인한다. 물론 그들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성취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최근 정부와 여권이 설득 없이 내리는 결정은 이들이 미래의 패러다임을 선도하고 혁신을 이루어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또 다른 권위주의 세력임을 보여준다.

대의는 국민의 삶의 질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 토론과 설득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현재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민주주의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의를 확보하는 길이다. 비상시국 운운하며 노동권, 생명권, 안전권, 환경권 등 기본권의 훼손을 극일의 길이라고 여기는 정치가 있다면 우리는 곧 그들도 극복의 대상으로 둘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대의의 힘은 강하다. 해방 후에는 친일 잔재 청산, 한국전쟁 후에는 경제성장, 5·18민주화운동 후에는 민주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사회안전망 확보가 대의였다. 촛불혁명 후에는 민주주의의 고도화와 혁신, 그리고 삶의 질의 향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은 위기를 극복하고 대의를 현실화시키는 정치에 지지를 보내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미래의 대의와 국민의 열망보다 정치가 항상 뒤처지고 변하는 세상과 조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효기간이 이미 지난 문화가 유독 정치에서만 넘쳐난다. 현재의 여권은 여전히 자신을 독재와 싸우는 민주화 투사로 여기며, 야권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방책으로 안다. 과연 우리는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인물과 판이 필요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1990년 3당 합당을 밀실에서 결정했을 때 이렇게 외쳤다. “대의를 논하는 정치에서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민주주의#시민사회#정치#토론#설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