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파트너가 리스크로…‘패권 전쟁터’ 된 글로벌 테크 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8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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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생각해 봤던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체험했다.”

국내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한국 수출규제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를 독점하는 ARM, 모바일 운영체제(OS) 시장 70%를 차지하는 구글이 중국 화웨이 제재에 동참했을 때 그럴 수도 있구나 했는데, 비슷한 일이 한국기업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어제의 파트너가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라 치명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라 공급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18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실제로 국내외 주요 테크 기업들은 국가간 패권전쟁을 피해 공급망 점검 및 조정에 나선 상태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수출 규제 등 기존 글로벌 분업 체계를 흔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 애플, 화웨이는 이미 밸류체인(가치사슬) 조정에 나섰다. 애플은 생산기지의 탈 중국, 화웨이는 기술의 탈 미국을 진행하며 ‘아군’을 찾는 중이다. 미중 무역 분쟁에 있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던 삼성은 최근 일본 수출규제로 불확실성이 커지자 전사 적으로 1~4차 협력사까지 밸류체인을 따져보며 공급처 다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 흔들리는 기존 질서

지난달 인도네시아 바탐에 대만 전자업체이자 애플의 주요 협력사인 페가트론의 공장 개장식이 열렸다. 중국 상하이 등에서 생산해 온 페가트론이 동남아시아에 공장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다른 애플 협력사 폭스콘은 최근 인도에 생산시설을 확대 중이다.

LA타임스는 15일(현지시간) ‘무역전쟁이 테크 제조사를 미-중 진영 둘로 가르고 있다’고는 제목의 기사에서 “페가트론의 인도네시아 공장 설립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전자 제조사들의 근본적인 생산기지 변화를 대표하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생산기지의 ‘탈 중국’ 뿐 아니라 ‘핵심기술의 내재화’에도 나서고 있다. 주요 기술은 직접 만들겠다는 것이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텔의 모뎀사업을 인수한 뒤 “아이폰의 핵심기술을 컨트롤하고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쿡 CEO는 꾸준히 핵심기술 내재화를 주장해 왔지만 최근 글로벌 무역분쟁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이 같은 전략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게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의 분석이다.

화웨이도 기술의 ‘탈 미국’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달 9일 화웨이개발자 대회에서 자체 OS인 ‘하모니 OS’를 처음으로 공개하고, 스마트TV에 첫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AP 설계는 자사의 팹리스 자회사안 하이실리콘을 통해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전략이다.

테크 기업의 공급망 변화는 ‘기술(미국)-소재(일본)-반도체 및 디스플레이(한국)-조립(중국)’으로 이어지는 기존 분업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단시간에 대체는 불가능하지만 시도하지 않을 수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중 무역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지정학적 긴장은 계속 될 것이다. 테크 산업의 무역 질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패권 전쟁터 된 테크 시장

특히 테크 기업이 공급망 재편에 나선 까닭은 테크 시장이 세계 정치 지형의 갈등이 표출되는 ‘대리 전쟁터’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1년 째 이어진 미중 무역전쟁과 5G 패권전, 프랑스의 반 구글 전선, 러시아의 애플 반독점 조사 등 테크 기업은 곳곳에서 각종 갈등에 휩싸인 상태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테크 시장이 5G 상용화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등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 자국중심주의와 맞물려 패권 전쟁터가 됐다고 보고 있다. 기존 컴퓨터, 스마트폰 위주의 시장은 글로벌 분업 구조로 여러 나라가 수혜를 입을 수 있었지만 5G 시대는 플랫폼을 선점한 소수가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안진영 SK증권 연구원은 “세계경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독일 인더스트리 4.0, 일본 소사이어티 5.0, 한국 8대 신성장 동력 등 주요 국가 미래 산업전략이 모두 정보통신기술(ICT)과 AI(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플랫폼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미래 먹거리가 달려 있어 국가마다 사활을 걸 수밖에 없고, 상대가 치면 아픈 분야”라고 말했다.

미중 무역분쟁과 성격은 다르지만 지난달 프랑스가 구글 등에 대해 디지털세 부과 법안을 상원에서 의결한 것도 미국의 데이터 독점에 대한 불안 요인이 한 몫 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를 글로벌 투자 거점지로 두고 있는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6월 한 심포지엄에서 “(구글)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연합군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자유무역 속에서 급성장한 한국 기업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LG그룹의 임원 대상 포럼 주제가 ‘미중 무역전쟁’이었다. SK그룹도 19일 열리는 ‘이천포럼’의 주요 주제는 AI와 동아시아이 지정학적 위기 등이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 일본, 미국 모두 중요한 파트너“라며 ”기술·통상 패러다임의 동시 전환은 수출 위주의 한국 기업에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학부 교수는 ”안보와 경제가 분리됐던 시기는 인류 역사상 최근 30년밖에 없다“며 ”안보와 경제를 함께 생각하며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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