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의 실록한의학]〈77〉부자의 두 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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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사약. 임금이 독약을 보내 죄인을 죽일 때 쓰는 약이다. 그래서 그 한자를 ‘死藥’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임금이 하사(下賜)한 약이란 뜻의 ‘賜藥’이 맞다.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고 죽는 것만으로도 임금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다. 사약의 주재료는 비상(砒霜)과 부자(附子)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비상의 산지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현 위산(玉山)이라는 지역의 우물인 비정이다. 푸른색 우물물을 모두 퍼낸 다음 비상을 캔다. 산에서 바로 캐낸 것을 비황(砒黃)이라 하고 비황을 갈아 만든 것을 비상이라 한다. 본래는 학질이나 기생충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했다.

부자는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한 독성 식물인데, 원뿌리(母根)인 오두(烏頭) 옆에 붙은 곁가지인 자근이다. 극한의 양기(陽氣)를 띠며 약성은 뜨겁고, 맛은 맵고 쓰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이 소리에 한을 더하고자 독약을 먹고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먹은 게 바로 부자다. 실제 일본의 유명한 부자 전문가 다쓰노(龍野)는 구내염을 치료하고자 과량의 부자를 복용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운 빈혈 증상을 경험했다.

서양에서는 부자를 ‘아코니틴’으로 불렀다. 그리스의 ‘아코네’라는 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코니틴에 의해 사망했다. 영웅 테세우스를 독살하는 데 쓰인 약물도 아코니틴이다.

중종반정 이후 유교적 이상정치를 꿈꾼 조광조는 서른여덟 살 나이에 사약을 받아 들고서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어라. 먼 길 가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조광조는 임금이 내린 사약 사발을 통째로 들이마시고도 죽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독주(사약)를 거듭 가져가 많이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다른 기록도 있다. 사약을 마셔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나졸들이 조광조의 목을 조르려 했다는 것. 그러자 조광조는 “임금께서 이 머리를 보전하려 사약을 내렸는데, 어찌 너희들이 감히 이러느냐”라고 소리 지르며 독주를 더 마시고 죽었다.

드라마에서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지만 실록의 기록은 다르다. 숙종이 사약을 고집하자 신하들은 “춘궁(春宮·세자)을 낳아서 기른 사람에게 사약을 내릴 수는 없다. 주례에 ‘공족(公族·왕족)은 목매어 죽인다”고 주장했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사약 때문이 아니라 목매 죽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왕족이지만 중종의 딸인 숙정옹주는 자신의 사위와 불륜에 빠졌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다.

사약의 재료인 부자가 들어간 대표 처방은 팔미지황환이다. 야뇨증과 양기 부족에 특효약이다. 잠을 자는 동안 젊은 사람은 방광에 고인 소변을 36.5도 체온만큼 데워 아침에 깰 때까지 저장을 하지만 아랫배의 양기가 떨어진 노인들은 이를 데울 수 없어 몸 밖으로 자주 내보내야 한다. 결국 노인에게 야뇨증은 자는 동안 양기 부족으로 자신의 방광이 차가워지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인 셈. 그래서 극단의 양기를 가진 부자를 탕제에 첨가함으로써 야뇨증을 치료하고 전체적으로 몸의 양기를 보충하려 한 것이다. 사약이 어르신들의 ‘성약(性藥)’으로 돌변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잘 쓰면 약이고 못 쓰면 독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사약#부자#성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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