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공약인 ILO 비준, 합의 없이 출구전략만 찾은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3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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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종=뉴시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종=뉴시스
고용노동부가 22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4개 중 3개에 대한 비준동의안을 올해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법 개정안 등 협약 비준을 위해 필요한 국내법 개정안도 같이 제출할 예정이다. 야당과 경영계는 “정부가 선(先)입법, 후(後)비준 약속을 뒤집고 비준부터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시킨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지난해 7월부터 협약 비준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만큼 이제는 정부가 책임지고 비준과 법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 논리다.

그러나 23일 한 노동계 인사는 “국회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것”이라며 “완벽한 출구전략”이라고 촌평했다. 이 인사의 분석을 종합하면 이렇다. 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다. 노동계는 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권한으로 협약부터 비준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경사노위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이 합의에 따라 국회가 관련법을 개정하면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밝혀왔다. ‘선입법, 후비준’ 구상이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정부와 국회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지자 올해부터 산입범위(최저임금 산정에 들어가는 임금의 항목)를 넓혔다. 주 52시간제의 부작용은 탄력근로제 확대로 보완하려고 했다. 이에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불참을 결정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에는 두 차례 총파업을 벌였다. 노동 친화 정부의 노정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게 된 것이다.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계의 압박에 코너로 몰린 정부는 결국 비준과 법개정 ‘동시 추진’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초 방침대로 법부터 바꾸자니 노동계 반발이 거세질 게 뻔하고, 국회 동의 없이 비준부터 하는 건 위헌 소지가 있는 데다 경영계 반발이 우려돼 나름의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마침 경사노위 공익위원들은 지난달 15일 경영계가 요구한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등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조 권리만 대폭 확대하는 비준 권고안을 내놓았다. 정부는 23일 “경사노위 권고안을 토대로 비준동의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결국 정부로서는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노동계에 ‘성의’를 보일 수 있게 됐다. 또 한편으로는 관련법 개정을 동시에 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경영계의 우려도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하지만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비준동의안과 관련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절충안이 아니라 국회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정부의 출구전략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타당하다. 정부로서는 명분만큼은 확실히 챙기는 ‘묘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노사를 끝까지 설득해 ‘합의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출구전략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고 공정한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정공법이다. 그게 정부의 권한이자 의무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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