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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만세하러 갔소”… 청주일대 8개면 밤마다 山上 횃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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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만세하러 갔소”… 청주일대 8개면 밤마다 山上 횃불시위

청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03-27 03:00수정 2019-03-2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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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2부)<제 47화>충북 청주
횃불만세운동을 창안한 조동식 지사의 동상. 그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다.
“밤에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오직 만세만을 부르는 운동자가 있었다. 이 운동자는 성격이 온순하며 목이 쉬도록 만세를 고창(高唱) 절규(絶叫)하다가 피로해지면 스스로 해산한다. 그 인원도 노인, 어린이 등이 뒤섞여 있어 한 동네 집집마다 1인 또는 2인 정도가 의무적으로 나가는 듯하다. 그래서 시험 삼아 그 집에 가서 물어보면 부인들은 ‘산에 만세 하러 갔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일제와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된 충북 청주 일대의 횃불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횃불만세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20여 일 지난 3월 23일경부터 4월 6일까지 청주 전역에서 계속됐다. 특히 4월 1일에 펼쳐진 횃불만세운동이 절정이었다. 청주 일대 8개 면의 산 위에서 동시에 전개돼 수백 명이 횃불을 밝히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충북 지역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조동식 지사의 횃불만세운동

2. 2017년 재연한 충북 청주시의 횃불만세운동. 3·1운동 당시 강내면에서 시작한 횃불만세운동은 청주 일대는 물론이고 충청도와 경기지역으로까지 확산하며 독립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3. 의병 항쟁에 이어 3·1 운동을 주도한 한봉수 의병장. 청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청주시 제공
횃불만세운동을 창안한 이는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살던 조동식 지사(1873∼1949)였다. 그는 횃불만세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긴급한 상황을 봉화로 알리는 봉화고변(烽火告變)의 예를 따라 산꼭대기에 횃불을 올려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만세운동의 기세가 발양(發揚)될 것이다.” 횃불만세운동은 그의 주도로 시작된 뒤 충청도의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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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은 3월 23, 24, 26일에 잇따라 주민들과 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횃불만세운동은 강내면 각 마을과 옥산과 남이면, 충남과 경기도 일부 지역으로 확산했다. 특히 3월 26, 27일에는 강내면과 충남 연기군의 주민들이 사전에 연락해 동시에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일에는 청주 중심지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산 위에서 수백 명이 모여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2일에는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으나 일경들의 감시 강화로 실패하자 오후 10시경 500여 명이 읍내 부근 산 위로 올라가 횃불을 밝혔다.

이달 20일 찾은 조 지사의 묘역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횃불을 높이 들고 있는 조 지사 동상과 손자 조남기 장군의 흉상이 있다. 조 지사는 횃불만세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비밀출판물을 배포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중국에 두고 온 조남기 장군이 6·25전쟁 당시 중공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사에 오르지 못했다. 조 지사는 뒤늦게나마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남기 장군은 중국 현역 군인 최초로 최고 정책자문기구인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냈고, 1992년 한중 외교 정상화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지사 동상에는 일제 법정에서 그가 밝힌 준엄하고 당당한 상고(上告)의 취지가 새겨져 있다. “본인의 금번 행위는 일본 정부가 승인한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정의 인도에 기초를 두고 자주 자립을 표시한 고로 세인이 이에 동정하고 이를 처벌한 판사나 인도 정의의 존중을 알고 있는 일본인도 모두 이를 축하하였고, … 포로로서 취급하는 것은 가하나 형벌에 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 번개대장 한봉수 의병장의 활약

청주시 내수읍 일대의 3·1만세운동은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1884∼1972)가 주도했다. 그는 ‘조선 후기 의병사’에서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1907년 의병으로 봉기해 1910년 초까지 30여 회에 걸쳐 일제와 교전을 벌이고 군자금도 모금했다. 특히 그는 번개대장이라고 불릴 만큼 기습과 변장 등을 활용한 유격전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10년 체포돼 ‘내란죄 수범(首犯)’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고 항고해 15년형으로 감형을 받은 뒤 옥고를 치르다 일제의 이른바 합방 대사령으로 출옥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뒤 충북 괴산의 홍명희와 함께 고향 선배인 의암 손병희의 집을 방문했다.

손병희는 이 자리에서 3·1운동 계획을 전하며 각각 귀향해 만세운동을 주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귀향한 한봉수는 기회를 엿보다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한봉수는 이튿날인 2일에도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장터로 나갔다. 그는 식목 행사 때문에 이곳을 지나던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인솔교사 엄익래 이건간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학생 및 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에 의해 다시 체포된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황경수 청주대 교수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 한봉수 의병장은 4월 시위에 앞서 3월 4일 청주 6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라며 “선생은 의병 항쟁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 최대의 만세 시위지 미원 장터

2016년 기준으로 청주 출신 독립유공자는 94명이다. 이 가운데 3·1운동 참여자는 34명으로 36%에 달한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과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청주에서 7차례에 걸쳐 5000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20명이 체포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황 교수는 “시위 현장에서 일제와 직접 충돌한 전국 평균 비율이 37%인데 충북은 55%로 전국 최고 수준”이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충북의 지역정서가 점잖은 양반 분위기였지만 의병과 3·1운동 등을 통해 드러난 항일 의식은 매우 뜨거웠다”고 소개했다.

청주시의 3·1공원은 이 같은 충북지역의 불타올랐던 독립운동 열기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충북의 독립유공자 513명의 이름이 적힌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민족대표 5인의 동상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이었던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의 동상이다. 당초 정춘수의 동상도 있었으나 시민단체가 친일 행적을 이유로 철거해 없어졌고, 그 자리에 횃불 조형물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1919년 3월 30일 미원 장터에서 1500여 명의 군중이 벌인 만세운동은 청주지역 최대 규모이자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 일제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이수란 이용실 신경구 등이었다. 신경구는 장터 김태복 집에서 이용실을 만나 이용실의 담뱃대를 신봉휴가 만든 태극기의 깃대로 삼아 시장으로 나갔다. 그는 시장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한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인 신경구를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하라” “신경구를 석방하라”고 소리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정문 기둥과 담장을 부쉈다. 당황한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마구잡이로 사격을 가했고, 그 자리에서 장일환이 순국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미원의 독립만세운동은 이 같은 폭압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흘간 계속됐다.

청주의 만세운동은 면서기들까지 나섰다. 4월 1일 오후 8시경 북이면 신기리 주민들은 면서기 김호상의 주도 아래 근처 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료 면서기였던 김정환 이시우 장성이 등도 김호상의 권유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주민들과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김호상은 일제에 체포돼 1년형의 옥고를 치렀고, 김정환 등은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

청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3·1운동#독립운동사#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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