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14〉하룻밤에 꺾이지 않은 들꽃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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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정은 실로 잊을 수 없고 의리는 진실로 저버리기 어려우니, 이승에서의 기박한 운명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승에서나마 남은 원을 이루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고전소설 ‘절화기담’ 중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 꽃에 매료되어 향을 맡아 보거나 방 안을 예쁘게 장식해 놓으려고 한다. 여기 ‘순매’라는 꽃다운 여인에게 매료된 이생 역시 그러하다. 준수하고 고상하며 풍채도 빼어난 재주 있는 선비가 우물 앞에서 이제 17세가 된 순매라는 여자에게 반한다. 안타깝게도 순매는 이미 시집을 간 지 몇 해나 되었다. 하지만 이생에게 그의 혼인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늘 순매 생각뿐이다. 어느 날, 사내종 하나가 순매가 전당 잡힌 은 노리개를 가지고 와 이생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생은 이 기회를 틈타 은 노리개로 순매와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고, 우물가에 가는 그에게 슬쩍 노리개를 꺼내 보이며 말을 건넨다.

“뜻밖에 노리개 하나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됐구나. 청춘은 다시 오기 어렵고 즐거운 일도 늘 있는 것은 아니지. 하룻밤의 기약을 아끼지 말고 삼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어떠하냐?”

그러나 순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물만 긷고는 가버린다. 이때부터 이생의 ‘순매 만나기 대작전’이 펼쳐진다. 이생은 참견을 좋아하고 사람을 잘 소개해 주는 데 능숙한 노파를 통해 순매를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절개가 굳어 노파가 억지소리로 꼬여낼 수는 없었다. 비록 신분이 천하나 성품이 고귀해서 이생이 바라는 대로 쉽게 뜻을 이루기 어렵고, 이생에게 마음을 두었어도 순매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였다. 사실 순매는 이생에 비해 신분도 낮았고, 이미 남편이 있기에 이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가 비록 천한 몸이지만 저 역시 사람의 성품을 지녔으니 낭군께서 사랑해 주시는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형편상 자유롭지 못하답니다.” 술주정뱅이에 용렬한 남편보다는 이생이 자신을 더 사랑해 주는 것을 알았기에 순매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이생과 순매가 만나는 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한 1792년 봄부터 1794년 4월까지 실질적인 만남은 불과 9번이었다. 여러 이유로 순매와 이생이 간절히 바라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매와 이생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짧은 하룻밤이 주어진다. 이생은 이 하룻밤으로 순매에게 더욱 빠져들었고 기나긴 만남이 되기를 바랐다. 그가 이생의 마음을 받아준 것일까? 그러나 순매는 이 만남을 마지막으로 이생을 거절한다. 주변의 감시가 날로 심해져 더 이상 틈을 낼 수 없으니 부디 몸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생이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랑을 표현했기에 그 마음에 부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매는 이생이 자기 내면보다는 겉모습에 매료되었고, 그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결국 이생을 거절한 순매의 마음은 이생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현실적 판단과 함께 길가에 핀 하찮은 들꽃이라도 쉽게 꺾을 수 없다는 그만의 항변이었던 것이다.
 
임현아 덕성여대 언어교육원 강사
#절화기담#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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