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원통형 건물 외부 살린채 내부 개조
쇼핑-영화 등 편의시설 갖춘 생활공간 변신
방패모양 등 건물마다 독특한 현대미 가미
역사는 끝없이 쌓인다. 하지만 역사의 유물을 쌓을 공간이 끝없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지난달 19일 오후 찾아간 오스트리아 빈 동남부의 퍼블릭 하우징 ‘가소메터’는 역사의 흔적을 효율적으로 남기기 위해 이 도시 사람들이 제안한 하나의 해법이다.
가소메터는 18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건설한 빈의 첫 근대적 사회기반시설이다. 시 전역의 가로등과 가정에 가스를 공급하는 공장이자 저장소로 100년 넘게 쓰였다. 오랫동안 빈 시의 랜드마크로 여겨졌지만 가동을 멈춘 뒤에는 버리기도 곤란하고 쓰기도 난처한 애물단지가 됐다.
빈 시는 건축가들과 협력해 호텔, 박물관 등의 재개발 계획을 검토했지만 재정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빈 시가 찾아낸 답은 사람들의 삶을 이 건물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 오스트리아 건축설계사무소 쿠프 히멜블라우가 만프레드 베도른, 빌헬름 홀츠바워, 장 누벨 등 3인과 협력해 설계한 퍼블릭 하우징이 가소메터의 부활을 위한 계획으로 채택됐다. 이들은 가소메터의 외형을 남겨 두고 내부를 완전히 바꿨다.
“빈 시에 가스를 공급하는 에너지 심장부였던 100년 전의 가소메터는 이제 시민들의 삶에 활력을 공급하는 새로운 심장부가 됐습니다. 먹고 자고 쉬는 아파트뿐 아니라 쇼핑, 레스토랑, 극장 등 생활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으니까요.”
이날 거주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윌리엄 펠릭스 씨(35·금융업)의 말대로 가소메터 내부 쇼핑몰과 별관 영화관은 평일인데도 북적거렸다. 영화를 보러 왔다는 대학생 미첼 마이어 씨(24)는 “이것저것 다양한 볼거리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기 좋아 한 달에 서너 번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소메터의 외관에 선명한 악센트를 준 것은 쿠프 히멜블라우 사무소가 B동 서쪽에 붙인 방패 모양의 건물이다. 은회색 스테인리스스틸과 유리로 감싼 이 학생전용 임대아파트는 심심하게 늘어서 있던 100년 묵은 가소메터에 세련된 현대적 이미지를 덧붙였다.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콘텐츠가 더해졌음을 알리기 위한 사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방패’가 없다면 그저 오래된 건물의 성의 없는 재활용으로 보였겠죠.”
쿠프 히멜블라우의 울프 프릭스 대표(67)는 “한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은 인상적인 건축물의 형태와 함께 그 도시와 시민을 기억한다”며 “건축가가 건축물의 형태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리 부분이 살짝 오목하게 굽은 ‘방패’ 모양은 오래된 건물의 모양에서 얻어졌다. 원통 건물 내부의 아트리움(atrium·안뜰) 보이드를 잘라내 전개도처럼 펴낸 것.
이곳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제니스 창 씨(27·학생)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 붙여진 건물의 모양은 얼핏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며 “과거를 현재로 이어내는 기하학적 관계를 만들려 했다는 건축가의 이야기를 최근에 전해 듣고 정말 감탄했다”고 말했다.
D동과 이어진 별관 극장의 붉은색 통로는 극장만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4개 동 810개 가구의 가소메터 거주자들과 빈 시민들은 영화 포스터와 낙서가 무질서한 듯 붙여진 이곳에서 휴식과 만남의 시간을 공유한다.
빈=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외벽안에 지은 아파트엔 ‘건물 속 정원’ 신선▼
■ 건물설계 프릭스-홀츠바워
▲동아일보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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