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내가 겨울 속에 있을때, 아내는 봄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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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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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하/허수경 지음/280쪽·1만1000원·문학동네

작가 허수경 씨. 문학동네 제공(오른쪽)
작가 허수경 씨. 문학동네 제공(오른쪽)
익숙했던, 그리고 확신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오래도록 내가 살던 이 땅을 불현듯 떠나고 싶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이국의 어디쯤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을 것만 같을 때. 이럴 때는 말없이 길을 떠나야 한다. 작품은 존재와 시간, 그리고 공간의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두 남자의 여정을 그렸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한순간에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40대 중년 남자 이연은 대학 선배가 있는 독일로 떠난다. 선배로부터 20세기 고고학자 이무가 쓴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의 번역서를 건네받은 이연은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한국을 떠나 독일로 온 이연처럼 이무도 독일을 떠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고대 도시인 하남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

작품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두 남성의 여정을 교차시키며 탄탄히 나아간다. 또한 이무가 하남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도시와 이름이 같은 여성인 하남은 두 남자의 닫혔던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

하남에 왔을 때 하남은 말한다. “사람들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공간 여행은 사실이라 여기면서 시간 여행은 믿지 않는다”고. 이무는 깨닫는다.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실은 전혀 다른 시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 기록을 읽은 이연도 깨닫는다. 아내와 나는 같은 시간을 보냈어도, 내가 겨울 속에 있을 때 아내는 봄 속에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갑자기 나는 이 사원 터가 폐허가 아닌,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원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저 여자가 걷는 곳에 있는 긴 사각형의 주춧돌 사이로 돌담이 올라오고, 그 돌담 사이에 창문이 만들어지고….’

작가는 고대 도시의 환영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확고했던 현실 인식을 느슨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윤회까지 확장된다. 아내를 잃은 이무는 여운이 있는 글을 남긴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 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태어난 나일 것이다.’

이연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리고 작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 또한 한국을 떠나 20년째 독일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뮌스터대 고고학 박사과정을 마친 작가가 들려주는 고고학 얘기도 흥미롭다.

미지의 도시나 낯선 유럽의 거리에서 실존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작가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늦가을. 비 오는 서울 밤거리를 오래 걷다가 얼마나 이곳은 나에게 낯선가, 생각했지. 그런데도 얼마나 익숙한가, 라고도 생각했어. 이 두 극 속에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동경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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