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기당 현상윤 선생 업적 담은 전집 출간

  • 입력 2008년 3월 12일 02시 59분


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졸업생 앞에 앉아 있는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 선생(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졸업생 앞에 앉아 있는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 선생(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9년 1월 초 당시 서울 중앙학교 교사였던 기당 현상윤(1893∼?) 선생과 교장이던 고하 송진우 선생이 일본 유학생 송계백을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송계백은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거사 계획을 국내에 알리고 독립선언서 초고를 건네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이날 만남을 계기로 이들은 이미 거사를 구상하고 있었던 중앙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종교계 설득에 나섰다. 독립만세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기당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처럼 기당은 인촌과 더불어 3·1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다. 기당이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대한민국 1호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 사상사에 정통했던 학자였고, 동아일보 등 언론 기고를 통해 민족 계몽을 주창한 사상가였다는 점, 수필 소설 시를 여러 편 남긴 문학가였다는 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당을 독립운동가 사상가 교육자 문학가로 재조명한 전집이 11일 나왔다. 기당이 저술한 책과 언론 기고, 육필 원고를 엮은 ‘기당 현상윤 전집’(나남·전 5권)이다. 기당의 학문적 업적을 다룬 단행본과 기당이 남긴 글을 일부 묶은 문집은 있지만 기당의 글을 망라한 전집은 처음이다.

2005년 25명의 학자로 구성된 ‘기당 현상윤 전집 간행위원회’(위원장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2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정리했다. 현재천(고려대 교수) 재민(KAIST 교수) 재현(동양그룹 회장) 씨 등 후손들도 함께 참여했다.

○ 민족의 독립을 사명으로 삼아

“내가 장차 조선사회에 대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엇비스름하게라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기당이 1918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를 졸업하면서 ‘졸업증서를 받는 날에’라는 제목으로 남긴 글의 일부분이다. 윤사순 교수는 “조국 독립 쟁취에 한몫을 하는 게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이라고 해석한다.

기당은 일본 유학 시절 인촌, 고하, 설산 장덕수, 벽초 홍명희 등과 교분을 쌓았다. 일본 유학을 마친 뒤 인촌과의 인연 덕분에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인촌, 고하와 함께 학교 숙직실에서 밤을 새우며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3·1운동 이후 옥살이를 한 그는 이후에도 일제에 의해 ‘불온한인(不穩韓人)’으로 낙인찍혀 광복 때까지 감시를 받았다.

○ 건국 이후 정부가 인정한 박사 1호

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한학자(漢學者)의 아들로 태어난 기당은 타고난 학자였다. 윤사순 교수는 서문에 “기당은 타고난 재질이 총명했으며 어린 나이에 한학의 기초를 배웠다”고 기록했다.

기당은 평양 대성학교를 나와 와세다대에서 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뒤 중앙학교 교사와 교장을 거쳐 1946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자 기당은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강의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학문적으로 미개척지였던 ‘한국 사상사’를 정규 과목으로 편성해 직접 강의를 했으며 그 결실을 모아 1949년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펴냈다. 그 이듬해 썼던 ‘한국사상사’는 뒤늦게 원고를 찾아 1960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출간됐다.

고려대는 6·25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3년 3월 조선유학사의 학술적 가치를 평가해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는 건국 이후 한국 정부가 인정한 첫 박사학위로 꼽힌다. 그러나 기당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납북돼 박사학위를 직접 받지 못했다.

○ 교육자, 사상가, 문학가의 생애

기당은 한국학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학자일 뿐 아니라 민족 계몽에 앞장선 사상가이자 문학가였다. 일찍이 나라의 재목을 육성하는 교육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교육 사업에 앞장섰다.

기당은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교육의 근본의(根本義)’라는 글에서 “지금 조선의 교육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손을 위해 교육을 하고 있는가”라며 교육의 가치를 설파했다.

전집에는 지인과의 인연을 엿보게 하는 글도 여러 편 있다. 1935년 ‘삼천리’에 쓴 ‘조선 대학의 사도 김성수 씨’라는 글에서 기당은 인촌을 가리켜 “무엇이든 한번 하려고 마음 잡으면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열성으로 기어이 성취하고야 만다”고 평가했다.

청렴한 교육자로서의 면모도 회자된다. 고려대 총장 시절 자기 봉급은 올리지 않고 교수 봉급만 올려 총장 수준에 이르게 한 점, 총장용 승용차는 업무에만 사용하고 출퇴근은 교직원용 차를 이용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당은 또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던 ‘청춘’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시와 수필 등을 발표했다. 윤사순 교수는 “한국 신문학을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뒤늦은 평가가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더욱 선생의 문학 작품도 조명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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