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거장’은 만화책 큰손이었다… 前 만화전문서점 대표가 본 봉준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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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스한 머리의 만화광 청년이 오스카상 탔다는게 아직도 안믿겨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구입… 日 작품보다 유럽-국내 단편 선호
모아놨다면 창고 하나 가득 찼을것”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개봉 후 본보와 인터뷰하는 봉준호 감독. 손에 든 영국 만화 ‘프롬 헬’은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동아일보DB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개봉 후 본보와 인터뷰하는 봉준호 감독. 손에 든 영국 만화 ‘프롬 헬’은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동아일보DB
1990년대부터 서울지하철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인근을 지키던 ‘만화 덕후들’의 성지. 만화 전문서점인 ‘한양문고’를 15년 넘게 들락거리던 한 단골이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2000년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구상할 때도 이곳에 있었다. 2005년 그가 구입한 프랑스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Le Transperceneige)’는 2013년 영화가 돼 세상으로 나왔고, 2020년 그는 오스카 4관왕을 거머쥔다.

감독 이전 만화가, 만화 수집가였던 봉준호 감독을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켜본 김기성 전 한양문고(한양툰크) 대표(61·사진)는 “부스스한 머리로 만화에 심취해 있던 한 청년이 오스카상을 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하고 나서 봉준호 감독이 한양문고에 찾아와 남긴
사인과 감사의 글. 김기성 씨 제공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하고 나서 봉준호 감독이 한양문고에 찾아와 남긴 사인과 감사의 글. 김기성 씨 제공
재정난으로 지난해 서점이 문을 닫고, 현재 온라인서점으로 전환하기까지 김 전 대표는 18년간 한자리를 지켰다. 서점에는 “한양문고 덕분에 ‘설국열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감사!!!!”라는 봉 감독의 친필 사인과 문구가 자랑거리처럼 걸려 있었다. 봉 감독은 이 만화를 접한 순간에 대해 “나의 위험천만한 영화적 모험은 그때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김 전 대표가 떠올린 봉 감독의 첫인상은 만화에 푹 빠진 평범한 덕후였다.

“고독하게 서점을 찾아와 생각에 잠기던 청년이었어요.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가 작품을 구상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골격이 커서 항상 눈길이 갔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작품 구상을 위해 즐겨 찾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만화 전문서점 한양문고(한양툰크)의 내부 모습. 현재는 카페가 들어섰다. 씨엔씨 레볼루션 제공
봉준호 감독이 작품 구상을 위해 즐겨 찾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만화 전문서점 한양문고(한양툰크)의 내부 모습. 현재는 카페가 들어섰다. 씨엔씨 레볼루션 제공
봉 감독은 매달 서점에 들러 한 시간 이상 책에 빠져들던 과묵한 청년이었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여러 책을 끄집어내느라 늘 책장을 어지럽혔어요.(웃음) ‘이 전집 다 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신중하게 몇 권을 추려냈죠.”

봉 감독은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만화책을 사는 ‘큰손’이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데 사고 싶은 만화책들을 계산대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을 때는 꼭 오스카상을 탔을 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만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죠.”

봉 감독의 만화 취향은 영화 취향으로도 이어졌다. 나루토, 원피스 등 일본 인기 시리즈보다는 유럽, 국내 작가의 단편을 즐겼다. 김 전 대표는 “확실히 유럽 작가의 단편 만화나 국내 작가들의 향토적, 인디적 작품을 선호했다”며 “평범한 소재에서 독특한 걸 들춰내는 그의 영화를 보면 만화들이 토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린 ‘기생충’ 스토리보드. 그는 작품 콘티를 일일이 그리기로 유명하다. CJ ENM 제공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린 ‘기생충’ 스토리보드. 그는 작품 콘티를 일일이 그리기로 유명하다. CJ ENM 제공
봉 감독은 한 출판 캠페인에서 “만화책은 웹툰과 달리 한 장, 한 장 샷을 넘기는 맛이 있다”며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와 찰스 번스 작가의 ‘블랙홀’을 명작 만화로 꼽았다.

봉 감독이 한양문고 단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변 출판인들은 김 전 대표에게 ‘오스카 수상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봉 감독 영화에 제가 기여한 바는 없지만 뿌듯합니다. 만약 봉 감독이 한양문고에서 샀던 만화책들을 안 버리고 모아 놨다면 방이나 창고 하나는 가득 찼을걸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카데미 시상식#기생충#봉준호#한양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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