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11>눈먼 인도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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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피터르 브뤼헐 ‘장님의 우화’. 1568년.
대 피터르 브뤼헐 ‘장님의 우화’. 1568년.
그림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관찰해 그림으로 기록했다. 농부, 지식인, 군인 등 당대 인간들의 모습이나 풍경, 또는 네덜란드 속담이나 성서 이야기를 그려 역사의 교훈을 전하고자 했다.

이 그림에는 멀리 교회가 보이는 전원을 배경으로 한 줄로 나란히 걷고 있는 여섯 명의 장님이 등장한다. 맨 앞에서 다섯 사람을 인도하던 장님이 맨 먼저 구덩이에 빠져 거꾸러지자 그를 믿고 따르던 두 번째 장님도 넘어지고 있다. 지팡이 끝을 앞사람과 마주 잡고 따라왔던 세 번째 장님마저 중심을 잃기 직전이고,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채 뒤를 따르는 나머지 세 사람도 같은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장님의 우화’는 마태오 복음 15장 14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못마땅해하며 비웃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여기서 ‘눈먼 이’는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보고도 알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을 말한다. 어리석은 지도자로 인한 폐해를 비유한 말로, 나라나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또한 보고도 알지 못하고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담고 있다. 이 그림이 울림을 주는 건 450년 전 화가가 전하는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브뤼헐은 죽기 1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스페인 펠리페 2세 통치하에서 네덜란드 독립 투쟁을 벌이던 반란군과 개신교도들이 대규모로 체포되거나 처형되던 암울한 폭정의 시대였다. 브뤼헐은 죽기 직전, 자신의 그림이 선동적으로 보여 가족에게 화를 입힐까 봐 다수의 그림을 불태워 버리라고 말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대 피터르 브뤼헐#장님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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