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종교인이 쓴 책에서 神을 말하지 않을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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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베스트셀러]1996년 종합베스트셀러 14위(교보문고 기준)
◇무소유/법정 지음/100쪽·범우사·절판

대재앙 이후 문명이 파괴되고 생명은 거의 사라진 디스토피아를 그린 코맥 매카시의 ‘로드’. 소설의 주인공은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어제처럼 무심하게 밝아오는 아침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당신을 마침내 보는 건가? 내 손으로 잡아 비틀 목은 있나? 심장은 있어? 당신은 영원히 저주받아야 해. 오, 신이여.’

무신론자의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이고 신뢰가 가지 않는 종교도 많지만,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로드’의 주인공처럼 신을 원망하면서도 다시 신을 찾곤 한다. 그런데 신은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에게서 멘토의 역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그들이 쓴 책은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그중 법정의 ‘무소유’는 이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조해진 소설가
조해진 소설가
무소유는 1976년에 출간됐지만 1996년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그 후로도 수년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켰다. 총 서른다섯 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책에는 외출을 다녀오고 빨래를 하고 독서를 하는 소소한 일상을 담으면서도 인생 인연 타인 평화 등에 대한 질문을 내려놓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은 이들도 그 내용을 알 만큼 유명한 에피소드인 표제작 ‘무소유’는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럽게 키우면서 얻게 된 즐거움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어느새 집착이 되어버리고, 법정은 이 경험을 통해 무소유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며 놀러 온 친구에게 난을 선물로 건넨다. 그리고 그는 쓴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갈 때에는 빈손으로 갈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사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2010년, 법정은 입적하면서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은 마지막까지 무소유를 실천하고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은 절판된 무소유를 소유하기 위해 한동안 고가의 중고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어째서 유독 불교 성직자들의 책이 종류도 많고 베스트셀러 비율도 높은 것일까. 아마도 승려는 다른 성직자보다 은둔의 삶이 가능해(보여)서일 것이고, 신의 구원보다는 스스로의 구도에 중점을 둔 불교 특유의 색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무소유에는 이런 문장도 적혀 있다.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전염병의 시대인데도 신이 지켜준다며 예배를 강행하는 일부 목사와, 다단계와 다를 것 없는 방식으로 신도들을 포섭해 온 신천지를 보면서 법정의 종교관은 인간적이고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법정이 보여준 실천으로서의 종교라면, 그리고 그 종교가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우리 마음 한 곳에 정연한 신전 하나씩 있어도 좋지 않을는지.
 
조해진 소설가
#무소유#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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