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의 무죄 흔들리는 日 사법체계[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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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2003년 5월 일본 교토 인근 시가현 병원에서 72세 남성 환자가 숨졌다. 만성 폐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인공호흡기가 꺼져 있어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다.

한 해 뒤 경찰 조사에서 간호조무사 니시야마 미카(西山美香·여) 씨는 “내가 인공호흡기 튜브를 제거했다”고 진술했다. 체포된 그는 12년형을 선고받았다. 2005∼2017년 형기를 꽉 채워 만기 출소했다. 그는 지난달 31일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찰은 왜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웠을까.

그의 악몽은 2004년 5월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시가현의 젊은 형사가 “죽은 환자에게 책임을 느끼느냐”고 몰아붙인 후 경찰서 출석을 요구했다. 형사는 대면조사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분명히 비상 알람이 울렸을 것이다. 당신이 그때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질책했다. 겁에 질린 니시야마 씨는 “알람이 울렸다”고만 답했다. 형사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규정에 금지된 음료수와 다과를 줬다. 경증 지적장애를 지닌 니시야마 씨는 형사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꼈다. 결국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법원은 2005년 11월 그의 유죄를 확정했다.

25세 꽃다운 나이에 투옥된 니시야마 씨는 “환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날벼락을 맞은 그의 부모는 길거리에서 서명을 받으며 무려 여덟 차례 재심을 청구했다. 일곱 차례는 번번이 기각됐고 12년이 흘렀다. 37세에 출소한 니시야마 씨는 사회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스마트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전과자 딱지에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자포자기 상태로 지내던 그에게 마침내 8번째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7년 12월 오사카고등법원은 ‘환자가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오쓰지방법원은 지난달 무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재심 판결문에서 “형사가 니시야마 씨의 호감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의 진술을 유도한 의혹이 있다”고 적시했다. 환자의 사망 원인이 만성 폐질환 등 다른 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인정했다. 재판장은 “조사와 증거 제시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됐다면 니시야마 씨가 체포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억울한 복역을 헛되게 하면 안 된다. 사법체계를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지적은 지난해 말부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자동차 회장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보석 중 해외로 도피한 곤 전 회장의 행동과 별개로 일본 사법체계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귀담아들을 면이 적지 않다. 변호사 없이 진행된 여러 차례의 조사, 3번의 투옥, 일본 역사상 최고액인 15억 엔(약 160억 원)의 보석금…. 사전에 ‘유죄’를 정해놓고 짜맞추기 수사를 벌였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니시야마 씨는 무죄 판결 후 눈물을 흘리며 “피의자로 불리지 않아서 좋다.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아직 끝은 아니다. 그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경찰의 강압수사가 어떻게, 왜 진행됐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 사법제도 개혁의 첫걸음도 여기서부터 시작일 것이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일본 사법체계#니시야마 미카#무죄 판결#카를로스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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