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이 건넨 빈 종이[현장에서/조건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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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100인의 두 번째 돌잡이’에서 대학원생 윤민경 씨가 “나는 꿈이 없다”며 내민 빈 종이. 윤민경 씨 제공
‘청년 100인의 두 번째 돌잡이’에서 대학원생 윤민경 씨가 “나는 꿈이 없다”며 내민 빈 종이. 윤민경 씨 제공
조건희 사회부 기자
조건희 사회부 기자
동아일보가 1일 창간 100년을 맞아 선보인 ‘청년 100인의 두 번째 돌잡이’ 시리즈는 기획부터 취재까지 꽤나 유쾌했다. 취재팀과 만난 19∼34세 청년 100명이 자신의 미래를 상징하는 물건을 하나 골라 그 안에 담긴 사연과 다짐을 소개한다는 설정이었다.

세상모르는 한 살배기 땐 돌잔치 상에 오른 정해진 물건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하지만 세상에 발을 딛는 청년들이 스스로 택한 두 번째 돌잡이 물건들은 백양백색(百樣百色)이었다.

인공지능(AI)이 일찍이 인간을 압도한 바둑계의 ‘인간 1인자’ 신진서 9단(20)은 ‘바둑돌’을 골랐다. AI가 2025년이면 사람의 업무 능력 70.6%를 대신할 거라는 전망(한국고용정보원)이 나오는 시대에도 인간이 두는 바둑의 의미를 탐구하겠다는 의지는 존경스러웠다.

공익변호사 이현서 씨(30)의 ‘복싱 글러브’도 멋졌다. 외국인고용법에 ‘인권’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현실과 싸우겠다는 의지다. 그는 국내 외국인이 생산가능인구의 10%가 넘기 전에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100명이나 인터뷰하다 보니 분량은 합쳐서 A4 용지로 153쪽이나 됐다. 하지만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의 옥다혜 씨(29)는 시리즈가 나간 뒤 ‘추신’을 보내왔다. “통일 한국의 주역이 돼 동아일보 창간 130주년에 정식으로 인터뷰 제안을 받겠다”고 당당하게 포부를 남겼다. 세월호 생존 학생 김도연 씨(23)가 5년의 아픔을 담아낸 ‘일기장’ 앞에선 경건해졌다. 언젠가 에세이로 엮어 친구를 잃은 이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한다. 책이 나오면 꼭 읽어보고 싶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환자들을 돌보려 육아휴직을 중단한 간호사 구기연 씨(27)는 간호사의 상징인 ‘흰 양말’을 골랐다. 닳아서 구멍 난 흰 양말을 갈아 신을 때마다 ‘딸이 닮고 싶을 멋진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할 그를 응원한다.

그런데 한 명, 빈 종이를 내민 청년이 있다. 대학원생 윤민경 씨(32)는 “나는 꿈이 없다”며 끝내 아무런 아이템도 고르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혀 계획도 희망도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뭐라도 만들어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며 “그렇지만 없는 걸 어쩌나”라고 되물었다.

윤 씨의 이야기는 결국 기사에 담지 못했지만 그의 대답이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꿈이 없다’는 말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수많은 청년의 마음을 대변하는 건 아닐까.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듣는 청년들에게 때로는 ‘꿈이 뭐냐’는 질문이 너무나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윤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먼 미래보다는 당장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잘 살지 생각해요. 만족스러운 하루가 쌓여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되는 게 아닐까요.” 윤 씨는 언젠가 빈 종이를 채울 수 있을까. 혹 채우지 않더라도 그 나름대로 소중한 하나의 길. 그가 건넨 말들을 자꾸만 곱씹게 된다.
 
조건희 사회부 기자 becom@donga.com
#동아일보#창간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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