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는 계속되어야 한다[오늘과 내일/하임숙]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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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 화상회의, 직장생활 새 질서… 그래도 사람 간 접촉이 경쟁력의 핵심

하임숙 산업1부장
하임숙 산업1부장
“비서가 재택근무라 직접 복사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사번을 넣어야 인쇄기가 돌아가고 출력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절차를 알아도 그 간단한 복사가 왜 이렇게 잘 안 되는지….”

어느 대기업 임원의 말이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주요 대기업에서 재택근무가 시작되자 직장인들은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회사 로비에서 체온 체크를 해서 열이 높은 사람은 돌려보내기 시작하자 일부러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뛰어와서 ‘합법적으로’ 집으로 가는 후배가 있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엔 진짜 아파도 집에 가기가 눈치 보였는데 지금은 유증상이라는 ‘무적의 통행증’이 생겼다는 반응도 있었다.

“A, B조로 나눠 절반은 재택근무하고 절반만 나와 있는데 일이 잘 돌아가네요. 사람 불안하게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절로 구조조정 소리가 나오겠다”는 말을 반은 농담처럼, 반은 불안감을 담아 덧붙이면서 말이다.

바이러스가 한국의 직장생활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 구글 같은 해외 정보기술(IT) 기업에서나 시행되는 것으로 알았던 재택근무가 한국의 대형 제조기업에서도 시작돼 아직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의 직장인들이 마치 한 회사를 다니듯 일제히 오전 8∼9시에 출근해 오후 5∼6시에 퇴근하다가 이제는 같은 회사 안에서도 시간대를 나눠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도 시간대를 나누고 구내식당에선 앞사람 등을 보며 식사하게 하는 곳도 있다. 보고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만 일을 한 것 같았다면 지금은 화상으로, 다중회선의 전화로 회의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뀐 질서에 직장인들은 환호할까. 편하다는 사람이 물론 많다. 하지만 수시로 화상회의를 호출하는 상사 때문에 산발적 일이 끝도 없이 진행된다며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회사 일이 끝나도 거래처와 술 업무를 당연히 진행했던 직장인들은 술 마시는 대신 집안 살림을 나눠 맡으면서 스트레스가 커졌다고 했다. 특히 하루 3끼를 챙기며 아이의 공부와 건강을 돌봐야 하는 엄마 직장인들은 “바이러스가 몸을 결딴내기 전에 육아 스트레스가 정신을 끝장내겠다”는 하소연도 한다.

이처럼 바뀌기 시작한 직장생활 질서는 바이러스 사태가 끝나도 재편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비대면 접촉이 강화될까. 우리보다 앞섰던 외국계 기업을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한 외국계 회사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짜놓은 전략은 화상이나 오디오 미팅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거나 새 전략을 짜려면 모여야 한다. 경험상 진짜 아이디어는 정해진 회의 시간이 아니라 잠깐 차를 마실 때,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일상을 나눌 때, 화장실 가다가 마주쳤을 때, 밥을 먹으며 수다 떨다가 나오더라.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직원들이 출장 가는 비용은 단 한 번도 깎지 않았다.”

화상회의나 오디오회의는 생각보다 비민주적이라고 했다. 오디오가 겹치지 않아야 하기에 발언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경우 활발한 토론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땐 대체로 발언권이 세거나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게 돼 있다.

아무리 질서가 바뀌어도,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이 중심이라는 사실은 위안을 준다. 사람을 못 만나는 상황이 지속되는 걸 견디지 못하겠는 게 나만은 아니어서, 또 수다가 우리 세계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라서. 그러니 즐겁게 외쳐본다. 수다는 계속돼야 한다, 쭉.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
#재택근무#화상회의#사람 중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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