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정진석]“동아일보 100년은 고난의 날줄과 영광의 씨줄이 교차된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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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바라본 동아일보는 주요 정치인과 경제인 학자 문인 등을 배출한 ‘인재의 집결처’였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바라본 동아일보는 주요 정치인과 경제인 학자 문인 등을 배출한 ‘인재의 집결처’였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민족과 함께 걸어온 동아일보 100년은 고난의 날줄과 영광의 씨줄이 교차된 역사였다.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는 제2의 독립선언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정신을 담아 역사적 의미와 시대적 사명을 압축적으로 서술했다. 무단정치 10년은 “곧 죽음의 땅이자 함정이라, 자유와 발달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는 말로 식민 치하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표현했다. 3대 ‘주지’ 가운데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항목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창립자 김성수의 중앙중학교는 3·1운동의 산실이었다. 교장 송진우는 48인의 한 사람으로 영어(囹圄)의 몸으로 묶여 있는 처지였다. 이후에 김성수-송진우 쌍두마차가 이끄는 동아일보는 당대 인물의 집결처였고 항일운동의 ‘최전위(最前衛)이자 총본진(總本陣)’(김동명·金東鳴, 1955년 8월 19일)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논설기자 장덕준(張德俊)은 창간 첫해에 일본군에게 피살됐다. 만주 훈춘(琿春)에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패한 일본군이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지역 동포를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서 동포의 참상을 취재하다가 일본군에 끌려간 뒤에 소식이 두절됐다. 신문이 무기정간 상태였기에 취재를 해도 보도할 지면조차 없었다. 그는 혈담(血痰)을 토할 만큼 건강도 좋지 않았다. 우리 언론 첫 순직 기자 28세, 시체를 찾을 길도 없다.

1974∼75년 백지광고 사태 당시 시민들이 ‘쪽광고’를 내며 동아일보를 응원했다. 동아일보DB
1974∼75년 백지광고 사태 당시 시민들이 ‘쪽광고’를 내며 동아일보를 응원했다. 동아일보DB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일제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때는 1931년 9월이다. 동아일보는 이해 ‘조선의 노래’를 공모하여 이듬해 4월 창간 기념일에 “백두산 뻗어내려…”로 시작하는 노래를 보급했다. 사실상 국가(國歌)나 다름없는 역할로 광복 후에도 많은 사람이 애창했다. 그해 5월부터는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 중수와 유물보존운동을 시작했다. 사원들이 앞장서서 성금을 냈고, 편집국장 이광수는 아산 현장과 남해안의 전적지를 답사한 다음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유적보존 사업을 뒷받침하는 언론사상 최초의 캠페인 소설이었다. 소설의 감동이 유적보존 사업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동아일보가 시작한 민족적인 사업은 나라를 되찾은 후 1966년에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열매를 맺었다.

문맹 퇴치 ‘글장님 없애기 운동’은 1928년에 시작할 계획으로 지면에 공포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1931년에는 ‘브나로드 운동(민중 속으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문자보급과 농촌계몽을 동시에 진행하는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 확대 실시했다. 1934년까지 계속된 이 운동도 편집국장 이광수는 ‘흙’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여 취지를 널리 알리고 감동을 주면서 농촌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나라 잃은 민족에게 신문은 교육자요, 정부였다. 문자보급 운동은 국내만이 아니라 일본(7곳)과 만주(29곳) 거주 동포들을 대상으로도 전개됐다.

만주사변에 이은 중일전쟁(1937년)으로 군국주의 서슬이 푸르던 시기의 언론은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파쇼 통치 아래 일본 국내에서조차 언론이 국가적인 통제하에 놓인 상태여서 식민지 조선에서 항일 논조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1936년 동아의 일장기 말소는 민족 언론의 저항정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한 사건이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 장면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가 여러 사원이 구속되어 총독부의 강요로 퇴사했고,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와 ‘신가정’까지 무기정간의 엄중한 시련을 겪었다. 이듬해 6월 1일에야 동아일보는 겨우 정간이 해제됐으나 두 잡지는 일제 기간에 끝내 속간되지 못했다.

수많은 기사 삭제와 압수, 네 차례 정간에 언론인 투옥이라는 수난 속에서 숨이 끊어졌다가 살아나기를 거듭하던 동아일보는 일제 패망 5년 전인 1940년 8월 10일에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민족의 대변기관을 자임(自任)하면서 출발했던 때로부터 20년 3개월 10일이었다.

문인들의 등용문이자 작품 발표의 무대도 신문이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한 문인도 많지만, 동아일보는 문인들이 기댈 수 있는 발표 무대였다.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광수는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가의 인기는 동아의 독자 유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윤백남(흑두건, 대도전), 김동인(젊은 그들), 현진건(무영탑)의 소설도 실렸다. 명사회부장이자 소설가 현진건은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강제 퇴사했다. 변영로, 주요한, 김팔봉, 이무영, 김말봉, 박화성, 강경애도 동아의 가족으로 근무했거나 발표 무대로 활약한 문인들이다.

광복 후 동아일보는 이념 갈등의 와중에 두 사람의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 사장 송진우, 주필과 부사장을 역임한 장덕수가 흉탄에 쓰러졌다. 송진우는 25년 동안 세 차례나 사장 또는 주필을 맡으면서 민족 언론을 이끈 실질적인 견인차였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여섯 명의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았다. 창간사를 집필한 장덕수는 2년 뒤 1947년 12월 2일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정치부장 등을 맡아 수석총무(당수)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흉탄에 쓰러졌다. 장덕수의 형 장덕준은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였기에 형제가 모두 비명(非命)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1950년대의 동아일보는 반독재(反獨裁) 민주화 투쟁의 선봉이었고 4·19혁명을 유발한 사실보도의 원천이었다. 기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치깡패의 조직적인 집회 방해와 부정선거를 폭로했고, 분노한 민심을 반영하여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후의 민주화 과정에 자매 잡지 신동아와 동아방송(DBS)은 필화에 휘말렸다.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 직후 계엄당국은 동아방송 방송부장 최창봉과 뉴스실장, 편성과장 등 간부들을 연행하고 이튿날은 동아일보 외신부장과 담당 프로듀서까지 구속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시사단평 ‘앵무새’와 뉴스가 정부 시책을 비난하고 6·3 학생데모를 선동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가 계엄 해제 후에는 민재로 이양되어 기소된 지 5년 만에 무죄로 종결됐다.

1968년 12월호 신동아 기사 ‘차관(借款)’ 필화는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동아일보에 재갈을 물려 전체 언론계의 기를 꺾겠다는 권력의 숨은 의도였다. 언론계와 정치권은 이를 강력히 비판했지만 동아일보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 다수가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유신정권의 언론 통제에 저항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선언’(1974년 10월)은 전국 언론사의 언론자유 수호투쟁으로 확산됐다. 권력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광고탄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동원해서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언론 목조르기가 자행됐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광고주들은 1974년 12월 26일자부터 광고를 내지 않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는 광고 없는 지면과 뉴스를 내보내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이처럼 고통받는 동아일보를 향한 국민의 애정과 성원이 줄을 이어 민중의 힘으로 언론탄압을 이겨내었다는 사실도 100년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이 무렵에 기자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회사와 갈등을 빚었고, 대량 해고로 이어지는 큰 상처와 치유되지 않은 후유증이 뒤따랐다.

동아일보는 인재의 집결처였다. 광복 후에 정치가로 활동하는 인물 가운데는 신문사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많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많은 동아일보 출신이 정계에 진출하여 큰 역할을 맡았다. 장관, 차관,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경제인, 학자, 문인도 많다. 국회의장 5명과 3명의 국무총리가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동아일보 100년이 근현대 역사에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며 얼마나 많은 인재를 포용했는가를 말하는 하나의 지표다.

동아일보라는 큰 울타리는 기자와 논객을 포용하여 정론직필을 펼쳤고 항일, 언론 자유 수호, 민주화와 산업화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면서 현대사를 기록하고 이끌어 왔다. 창간 100주년의 경사를 축하하면서 다가올 100년도 민족과 함께하고 여론을 선도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정진석 교수#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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