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올림픽’[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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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의 전쟁’ 승리하여
내년엔 상처 씻어주는 축제로

김종석 스포츠부장
김종석 스포츠부장
‘피겨 여왕’ 김연아가 빙판 밖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2차 유엔총회에서 특별연사로 나섰을 때다. 이 회의는 평창 올림픽 개막 7일 전부터 패럴림픽 폐막 7일 후까지 모든 적대행위 중단을 촉구하는 ‘올림픽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는 자리였다.

진녹색 정장을 입은 김연아는 3분 40초 동안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준비한 영어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당시 북한의 도발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했던 데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 김연아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올림픽 정신은 특정 종교나 세대뿐 아니라 국가, 지역, 믿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올림픽의 목적은 스포츠를 통해 인류의 조화로운 발전과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스포츠라는 아름답고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낼 것이라 강하게 믿는다.’

올림픽 휴전 결의는 1993년 시작된 뒤 여름, 겨울 올림픽이 열리는 시기에 유엔총회에서 채택해 왔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도 지난해 12월 이뤄졌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적 앞에 협정은 무용지물이 된 듯하다. 7월 24일 개막 예정이던 도쿄 올림픽은 1년 연기됐다. 올림픽 연기는 124년 사상 처음이다. 과거 3차례 올림픽이 취소된 적이 있는데 모두 전쟁이 그 사유였다.

이번 올림픽 연기도 넓게 보면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전쟁 때문이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확진자와 사망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대공황의 공포감이 감돈다. 각국 정상들은 현 상황을 세계대전 같은 전시로 간주하고 있다. 이동 금지, 배급, 군수물자 조달 등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다급한 모습은 TV만 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올림픽 강행을 고집하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일본은 대회 보이콧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국제적인 반대 여론에 백기를 들었다.

도쿄 올림픽 연기는 올림픽 휴전의 전통을 되돌아보게 한다. 에케케이리아(Ekecheiria·무기를 내려놓는다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불리는 올림픽 휴전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776년부터 393년까지 1200년 가까이 지속된 고대 올림픽은 전쟁에 자주 시달렸다. 그래도 대회 기간만큼은 출전 선수와 여행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그리스 전역에 휴전이 선포됐다. 이를 어기는 도시국가는 중징계를 받았다. 스파르타는 무력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양 20만 마리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고, 대회 출전이 금지됐다는 기록도 나온다. 심지어 재판이 중단되고 사형도 연기됐다. 고대 올림픽에는 평화와 풍요에 대한 그리스인의 염원이 담겨 있었기에 대회 기간만이라도 창칼뿐 아니라 적대감도 내려놓자는 의도였다.

고대 올림픽은 전쟁과 함께 전염병에도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아테네의 쇠락 원인으로는 스파르타와 27년간 치른 펠로폰네소스전쟁과 전염병이 꼽힌다. 아테네대 연구에 따르면 장티푸스가 만연해 전쟁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아테네 시민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체대 조준호 교수는 “종교 의식의 성향이 강했던 고대 올림픽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수천 년 세월이 흘렀어도 올림픽을 둘러싼 위협은 여전하다. 전쟁과 전염병뿐 아니라 정치적 야심과 상업주의가 가세하면서 올림픽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은 인류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하는 스포츠의 힘과 잠재력을 강조했다. 처음으로 홀수 해에 열리는 도쿄 올림픽이 진정한 평화와 치유의 무대가 됐으면 좋겠다. 물론 바이러스 격멸이 먼저겠지만.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코로나19#치유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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