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끊긴 실리콘밸리… 발 묶인 신기술 프로젝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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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기업들 혁신전략 ‘코로나 불똥’

“올해 상반기(1∼6월) 미국 내 신규 투자는 사실상 끝났다.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데 무슨 돈을 쓰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한국 대기업 임원은 26일 올해 현지 사업 계획을 묻자 이같이 말했다. 이 임원은 “현지 스타트업과 진행 중인 투자, 협업 프로젝트는 화상회의로 진행하는데 아무래도 속도가 느리다. 연초에 서울 본사에 보고했던 각종 계획을 다 바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미국에서 빠르게 확산하면서 첨단 기술과 신개념 서비스를 찾아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주요 그룹사의 ‘개방형 혁신 전략’에도 불똥이 튀었다. 실리콘밸리 내 인적 교류가 중단되며 새로운 투자, 협업 기회를 발굴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출장길이 끊기면서 의사결정 속도도 느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실리콘밸리에 법인을 둔 국내 한 제조업체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올해 1월 1000억 원 규모의 펀드 조성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미뤄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적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경영진이 신사업 발굴을 위한 펀드 조성에 돈을 쓰는 데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 현지 주재원은 “스타트업 투자에 아낌없이 돈을 뿌렸던 실리콘밸리 지역 대형 밴처캐피털(VC)조차 ‘지금은 현금을 확보할 때’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실리콘밸리 지역에 2012년 삼성전략혁신센터(SSIC)를 세우고 이듬해 삼성넥스트를 구축하는 등 스타트업 투자뿐만 아니라 현지 인재 확보에도 주력해온 삼성은 코로나19 사태로 채용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IM) 임원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인재 확보와 협업 프로젝트를 챙겨왔는데 출장길이 막히면서 의사 결정이 어려운 상황으로 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실리콘밸리 투자 사무소 격인 크래들도 신규 프로젝트 발굴과 사업 추진 여부를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 사정에 밝은 재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슈로 글로벌 완성차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위기 상황에서 ‘신사업 발굴’이라는 키워드를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LG그룹은 미국에서 다음 달 열릴 예정이었던 인재 영입 행사 ‘LG테크콘퍼런스’를 취소했다.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 실리콘밸리 법인을 통해 현지 스타트업 발굴을 이어온 SK그룹 역시 코로나19의 확산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 산업계의 또 다른 신성장 동력으로 꼽힌 제약·바이오 업계도 미국 지역 투자·협력사와의 교류 축소 분위기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은 일반적으로 미국 지역에서 열리는 대형 학술 대회나 콘퍼런스를 통해 투자할 만한 벤처기업을 발굴하고 글로벌 업체와 기술 수출 계약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 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국 암연구학회 학술대회가 올해 하반기(7∼12월)로 잠정 연기됐고,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콘퍼런스인 ‘바이오USA’(6월·시카고)는 개최 일정이 불투명하다.

한 대형 제약사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벤처기업에 투자해 신약 물질이나 기술을 확보했는데, 각종 행사가 취소되고 출장길도 막히면서 상당수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면서 “기존 투자 및 개발 계획은 전부 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민구 warum@donga.com·임현석 기자
#실리콘밸리#코로나19#제조업체#삼성전략혁신센터#lg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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