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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대신 ‘이동식 정자’ 들고 캠핑 즐긴 조선시대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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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대신 ‘이동식 정자’ 들고 캠핑 즐긴 조선시대 선비들

조종엽 기자 입력 2020-02-25 03:00수정 2020-02-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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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속 조상들의 취미생활 살펴보니
실학자 서유구가 남긴 ‘임원경제지’ 가운데 ‘이운지’에는 가족과 시골에서 삶을 즐기는 방법이 담겨 있다. 이를 번역, 출간한 임원경제연구소는 “조선의 생활문명이 담긴 이운지에서 오늘날 일상의 변화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은 평상 아래 자리를 깔고 한적함을 즐기는 모습이 담긴 조선시대 그림(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석문화재단 제공
기이하다. 은둔한 선비의 원림(園林)에 들어선 듯 댓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다가도 어떻게 보면 마치 조선판 ‘돈키호테 쇼핑’의 문을 연 것 같다. 매우 실용적인가 하면 쓸데없는 ‘고퀄’의 물건들이 이어지고, 고졸(古拙·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한가 하면 장식적인 물건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풍류가 밴 물건과 매우 기능적인 물건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 책은 조선의 실용지식 대백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가운데 ‘이운지(怡雲志)’다.

임원경제지는 농학의 대가인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홍문관 부제학에서 물러난 뒤 손수 농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18년 동안 편찬, 집필한 책이다. 113권 54책으로 250만 자가 넘는다. 이 책을 번역 중인 임원경제연구소가 총 16개 부분(志·지) 가운데 다섯 번째로 선비들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한 ‘이운지’를 최근 번역 출간(풍석문화재단)했다. 총 4권. ‘이운(怡雲)’은 “산중에서 구름을 즐기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다”는 중국 남조 대 인물인 도홍경(456∼536)의 시에서 따 왔다. “맑은 마음으로 고상함을 기르고 한가로이 소요하며 유유자적하는” 서유구의 이상이 담긴 이운지에서 조선 선비들이 꿈꾼 ‘웰빙’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책은 선비가 은거할 곳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거할 집은 “크거나 넓게 짓지 않는다”, “무궁화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띠를 엮어 정자를 만든다”는 시작 부분은 오늘날의 통념 그대로다.


그러나 여러 건축물과 정자 소개는 선비들의 이상적 은거생활이 과연 소박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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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좋을 때마다 차를 담은 병이나 술동이를 가지고 정자에 이르러 난간에 기대고 낚싯대를 드리우며…새벽에는 오리가, 저녁에는 기러기가 물 위에 넘쳐나고….”

정원에 모여 한때를 즐기는 명사들의 모습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인물을 담은 부분. 풍석문화재단 제공
저수지에 짓는 정자인 ‘수사(水榭)’에 대한 설명이다. 이 밖에 강가, 채소밭, 시냇가에 딸린 정자가 따로 있다. 휴식공간인 원실을 비롯해 습기를 막는 온각(溫閣), 차 마시는 공간, 금(琴) 연주실, 서재, 약제실, 장서각(藏書閣), 응접실, 서당, 활 쏘는 정자, 누에 치는 방, 길쌈하는 방이 잇달아 소개된다. 웬만큼 여유 있는 사대부도 따라 하기 어려울 정도다. 연구소는 “이런 건물을 다 갖추라는 게 아니라 처지에 따라 용도에 맞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소확행’의 방법도 알려준다. 선비가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는 일’을 즐길 형편이 안 되면 어떻게 할까. 이운지는 “혹시 사는 곳이 낮고 좁거나 거처를 자주 옮겨야 한다면 ‘담병(膽甁·목이 길고 배가 불룩한 병)’에 꽃을 꽂아두었다가 수시로 바꿔준다”고 했다. 그러면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이 즐거움은 가진 자들이 탐하지 않고, 얻으려는 자들이 다투지 않음에도 잠시라도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은거지에 연못을 팔 처지가 아니라면 항아리로 ‘분지(盆池·항아리를 이용한 못)’를 만들 수 있다. “큰 항아리를 줄 세워서 땅에 묻고 항아리 사이사이 틈에 갈대와 부들을 심으면” 진짜 연못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운 다음 수면에는 개구리밥 잎을 던져 띄우고, 연 따위를 심으며 그 속에는 물고기를 기른다.”

오늘날 캠핑용품 못지않은 도구도 많다. ‘택승정(擇勝亭)’은 이동식 정자다. 기둥과 도리(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나무), 장막을 필요한 곳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봄날 아침 꽃이 핀 교외나 가을날 저녁 달 밝은 마당”에 세우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장정 1명이면 이 정자를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했다. 휴대용 찬합인 ‘제합(堤盒)’에서 술잔과 호리병, 젓가락과 접시를 꺼내 술을 마시고, 휴대용 화로인 ‘제로(堤爐)’에서 숯불을 피워 물을 끓이면 금상첨화다. 이것저것 다 귀찮으면 휴대용 술통인 ‘생황호(笙簧壺)’ 하나만 챙겨도 된다. 술을 담는 대나무통 아래 안주와 과일을 담는 나무통이 악기 생황처럼 일체화된 모양이다.

이 밖에도 임원의 즐길 거리인 차(茶)와 향(香), 금(琴)뿐 아니라 서재와 도서 관리, 골동품과 예술품 감상법 등을 꼼꼼히 소개한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가정용품이나 음식을 만들고 직물을 염색하는 임원경제지 속 선비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다르다”며 “이운지에서는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즐기려 했던 여가의 경지와 품격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원경제지#이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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