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창고에서 꺼내 든 아이언[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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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우승한 박희영처럼 접어둔 날개, 다시 펼쳤으면

김종석 스포츠부장
김종석 스포츠부장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나갔더니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몇 년 전 한 카페에서 만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프로 박희영(33)의 아버지 박형섭 씨(59)다. 2녀를 둔 박 씨는 두 딸 모두 프로골퍼. 둘째 박주영(30)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뛰고 있다.

당시 박 씨는 두 딸 걱정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통풍에 걸렸다. 왼쪽 발바닥이 퉁퉁 부어 신발도 신을 수 없었다. 바람만 살짝 스쳐도 통증이 심해 통풍이라던가.

하지만 박 씨는 자신의 몸보다 자녀들이 겪는 마음고생에 연방 한숨을 쉬었다. 두 딸 모두 기대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오죽하면 필자에게 “아이들에게 절대로 운동은 시키지 마라”라고 했을까.

박 씨 집안은 스포츠 가족이다.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나온 박 씨는 대림대 스포츠지도과 교수다. 골프 베스트 스코어는 67타(남서울CC). 그의 부친도 체조 국가대표를 거쳐 서울대 교수 등을 지냈다. 11세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골프를 시작한 박희영은 국내를 평정했다. 더 큰 꿈을 품고 미국에 진출했으나 오랜 침묵에 빠졌다. 1등만 기억한다는 스포츠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의 속은 까맣게 탔다.

그랬던 박희영이 며칠 전 호주 빅 오픈에서 7년 만에 3번째 LPGA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54번의 도전 끝에 한국 선수로는 역대 최고령 LPGA 챔피언도 됐다.

박희영은 대회 기간 초속 17m 강풍과 맞섰다. 피칭웨지 거리인 105야드에서 5번 아이언을 잡기도 했다. 그래도 낮은 탄도의 구질에 자신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포기했다면 없었을 기쁨이었다. 2018년 12월 방송인 조우종의 동생과 화촉을 밝힌 박희영은 결혼 후 첫 시즌인 지난해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2008년 미국 진출 후 처음 투어 출전권까지 잃었다. 골프를 관두려던 그를 붙잡은 건 아버지와 남편이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으냐. 결과를 떠나 부담 없이 재도전하라’고 응원해줬다.”

투어 재입성을 노린 퀄리파잉 시리즈에는 6년 전 사용했던 아이언을 들고 나갔다. “예전 우승할 때 썼던 거다. 친정집 창고에서 꺼냈다. 이번 우승도 그 아이언이었다.” 좋은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을 만큼 절박했던 그는 2위로 합격한 뒤 10대 때만큼 훈련에 매달렸다. 연말에도 귀국하지 않고 샷을 가다듬었다. 3월 말 시즌에 들어간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1월부터 대회에 나섰다.

우승의 감격은 남달랐다. “내 또래 선수들이 자기 일처럼 너무 축하해 줬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고도 하더라.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다.”

언니 경기 보러 갔다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박주영은 206개 대회에서 무관이다. 박희영은 “서른 살 동생에게도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9시즌 LPGA투어 우승자 평균 연령은 24.6세. KLPGA투어는 22.9세다. 지난해 국내 투어 30대 우승자는 단 한 명이다. 이번에 박희영과 4차 연장전을 치른 최혜진은 21세. 박희영 역시 세대교체의 기수였다. 한영외고에 다니던 2004년 17세 나이로 KLPGA 하이트컵에서 우승했다. 한국 여자골프에선 20대 중반만 넘어도 황혼기로 불린다. 일찍부터 운동만 하다 보니 부상과 목표 실종 등으로 슬럼프에 빠지면 재기가 쉽지 않다. 어린 후배들에게 밀리고 치이다가 사라지는 선수가 허다하다. 어디 골프뿐이랴. 결혼 출산 등으로 일을 관두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능력이 있어도 한번 단절된 경력을 연결하긴 쉽지 않다.

‘새댁’ 박희영의 최고령 챔피언 등극이 희망의 바람이 됐으면 좋겠다. 우선은 일단 해보자는 용기와 주위의 격려가 추진력이 되지 않을까.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미국여자프로골프#박희영#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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