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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관두고 일 도우라” 부친 부름에…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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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관두고 일 도우라” 부친 부름에…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서동일기자 입력 2019-12-14 11:18수정 2019-12-1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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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직후 모습.

196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구인회 LG 창업주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50%씩 출자해 상업 방송국을 개국했다. 1964년 5월 9일 서울 태평로 안국화재보험빌딩에서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그 해 12월 7일 동양TV까지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업은 초창기부터 삐걱거렸다. 삼성과 LG 직원들은 서로에 대한 문화차이와 이해 부족으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당시 구 창업주와 이 창업주는 비슷한 연배에다 사돈지간이었다. 구 창업주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호암(이 창업주의 호), 양가의 불화설이 장안에 퍼지고 있으니 창피하네. 손해가 큰 TV 방송국만 이쪽에 넘겨주려면 라디오 서울의 청산 차액을 빨리 주게. 만약 자네가 TV 방송국까지 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게. 우리 손자들의 장래를 생각해서일세.”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자서전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당시 상황을 묘사하며 ‘부친이 방송 사업 포기를 결심하시던 그때만큼 심각한 고민에 빠지신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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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창업주가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인화를 중시하며 과감히 사업까지 포기했던 것은 경영자 수업을 받던 구 명예회장에게 큰 교훈이 됐다. 1970~1995년 동안 LG그룹 회장으로 재임했던 구 명예회장은 인화를 LG의 핵심 철학으로 만들었다.

● 몸으로 깨우친 현장의 중요성

구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를 졸업한 뒤 1946년 진주 지수초교 교사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의 격동기 속에 미래 일꾼이 될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보람된 일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던 1950년 5월 “교직을 그만두고 내 일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을 받았다. LG 사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사람 손 하나가 아쉬울 때여서 구 명예회장은 자신의 꿈을 접었다.

당시 구 명예회장이 LG에 합류에 했을 때 오너로서 ‘폼’ 나는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제품을 나눠주고 낮 동안에는 종일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이면 이틀에 한번씩 숙직을 했다. 추운 겨울이면 판자방에서 군용 슬리핑백에 들어가 몸에 온기가 돌 때까지 잠을 설치곤 했다. 이 생활을 무려 4년 가까이 했고 부친은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다.

구 창업주는 1960년대 후반 병상에서 운명을 앞두고 투병하던 도중 구 명예회장을 불렀다. “나를 많이 원망했제.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 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이제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 나가라.”

1969년 12월 부친이 사망하자 구 명예회장은 이듬해 1월 락희금성그룹(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병상에서 들은 부친의 조언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 인화의 다른 말은 ‘합리성’

구 명예회장은 종종 사석에서 ‘피를 나눈 부모형제 사이에도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다투는 일이 많은데 사돈지간인 구 씨와 허 씨 집안은 어떻게 평생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구 명예회장은 단호히 대답한다. “합리적으로 일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인화는 ‘한 집안이니까, 우리끼리니까 서로 봐주며 하자’는 온정주의가 결코 아니다. 사전에 충분한 합의를 거쳐 원칙을 정해놓고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결과에 대해 정확한 분배를 해 왔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에는 회사 규모가 작아 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사업을 운영하다보니 자연히 서로 신뢰하며 책임을 다하는 ‘인화’가 실시됐다. 하지만 회사가 점차 커지면서 인화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1989년 실시한 그룹 이미지 설문조사에서 변질된 인화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응답 사원 중 57.8%가 ‘LG는 보수적인 회사, 인간적인 회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진취적인 회사’라고 응답한 비율은 1.8%에 그쳤다. 대학 졸업생들도 “조직분위기가 인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편한 회사라고 들었다” 등과 같은 이유를 대며 LG를 선택했다.

구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인화는 경영의 본체인 사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조직 내 ‘인화’를 빙자해 뿌리 깊게 퍼져 있는 무사안일과 비합리적인 풍토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구 명예회장은 틈나는 대로 공장과 지방 현장으로 내려가 종업원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합리성과 주인의식을 강조했다.

● 말년은 ‘버섯’과 ‘골프’ 사랑

구 명예회장인 자신이 만 70세가 되던 1995년에 LG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고 구본무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구 명예회장에 이어 LG그룹을 이끈 아들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5월 별세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뒤 충남 성환 시에서 붙박이 생활을 하면서 버섯 재배에 빠졌다.

1992년 경 ‘국내에 버섯공장은 여럿 있어도 종균(種菌)하는 곳은 없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렇다할 지식도 없이 달려들었지만 어느 새 개인연구실까지 만들어 버섯연구를 이어갔다. 팽이버섯으로 시작한 연구품종도 만가닥버섯 세송이버섯 등으로 다양해졌다.

골프도 즐겼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1주일에 한 번씩 대종회 회원이나 퇴직 임원들과 골프를 쳐 왔고 평소 90대 후반 타수를 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11월 경기 광주시 곤지암컨트리클럽에서 84타(12오버파)를 쳐 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더 적은 타수를 치는 이른바 ‘에이지 슛(Age Shoot)’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계에선 구 명예회장이 만 70세에 장남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후 취미생활을 한다는 자체가 한국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재벌가 오너의 집안싸움은 상시적으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의 ‘무욕(無慾) 경영’ 덕분에 그는 한국 재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 받는 원로로 자리매김 했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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