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날짜까지 잡았는데 암 재발, 5년 사귄 남친에 이별 선언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5일 15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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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우리 인생의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몇 해 전 가을, 라디오 작가로 일할 때 일이다. 매일 오후 4시에 소소한 일상을 전하며 노래를 틀어주는 방송이었는데 한 청취자가 진지한 사연을 보냈다.

저에게는 5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5년 동안 만나면서 한 번도 안 싸울 정도로 마음이 잘 통했습니다. 사귄지 5년째 되던 날 남자 친구는 프러포즈를 했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 날까지 잡았는데, 제가 최근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대장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남자친구도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좌절감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해준 덕분에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힘든 시간을 잘 견딘 덕분인지 “상태가 좋아졌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고생해준 남자 친구가 너무 고마웠고, 우린 예전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연애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결혼 이야기가 나와 날짜도 정하고 예삭장도 예약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암이 재발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저는 사람도 안 만나고 방구석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는데 또 한번 남자 친구는 나에게 용기를 줬습니다. 딱 한번만 더 해보자는 말에 저는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항암치료가 별로 효과가 없었고 지쳐갔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옆에서 고생하는 남자 친구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자 친구를 놓아주기로 결심하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남자 친구와 만나는 5년 동안 따뜻한 밥 한번 차려준 적이 없어 못하는 요리지만 밥도, 국도 하고 그렇게 밥상을 차렸습니다. 밥을 다 먹을 때 즈음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태연하게 밥이랑 국까지 다 먹더니 “결혼해서 단 하루를 같이 살더라도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 우리 결혼하자!”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남자와 곧 결혼하는데 남자 친구가 매일 운전하면서 이 방송을 자주 듣는다고 해서 방송을 통해 축하받고 싶습니다. 저희 결혼 축하해주세요.

사연을 소개하는 동안 DJ였던 김창열 씨는 눈시울이 벌게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청취자 문자가 쇄도했다. 그날 라디오 초대가수가 바비킴이었는데 두 사람의 사랑 얘기에 감동 받았다며 그 자리에서 라이브로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를 불러줬다. 이날 방송은 많은 사람에게 회자 됐고 유명 아나운서가 두 사람의 결혼식 사회를 봤으며 가수 DJ DOC가 축가를 불렀다. 방송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가끔씩 방송에 문자를 보냈고 1년 넘게 소식을 전한 걸로 기억한다. 살아서 다시 만나는 게 기적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에 두 분도 여전히 기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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