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황연주 한송이, V리그 원년멤버가 만드는 붉은 노을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11월 19일 11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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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황연주(왼쪽)-KGC인삼공사 한송이. 스포츠동아DB
현대건설 황연주(왼쪽)-KGC인삼공사 한송이. 스포츠동아DB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맥아더 장군은 말했다.

하지만 V리그 출범과 함께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베테랑들은 조용히 사라지기를 거부한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처럼 현대건설 황연주와 KGC인삼공사 한송이는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있다.

수원 전산여고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한국여자배구가 가장 빛났던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때 대표선수로 활약했다. 2005년 V리그 출범과 함께 한 이들은 16시즌 동안 엄청난 기록을 쌓았다. 11월18일 현재 황연주는 시즌통산 5980득점으로 이 부분 1위다. 한송이는 5227득점으로 통산 4위. 양효진(5715득점), 정대영(5339득점)과 함께 4명뿐인 5000+클럽 멤버다.

세월은 무심했다. 어느새 30대 선수가 됐다. 화려한 기록은 숫자로만 남아 실감나지 않는다.

내 자리였던 곳은 후배들이 차지했다. 차츰 웜업존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이제는 끝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듯싶었지만 아직은 팀에 필요한 존재였다.

최근 황연주는 외국인선수 마야를 대신해 자주 출전하고 있다. 마야가 피로누적과 부상 등으로 제 역할을 못하자 이도희 감독은 베테랑을 호출했다. 13일 흥국생명과의 경기에서는 왜 황연주인지를 새삼 확인시켰다. 4세트를 뛰며 9득점 35%의 공격성공률을 기록했다. 16일 KGC인삼공사전에서도 1세트를 뛰며 2개의 공격득점과 블로킹을 기록했다. 점프는 여전했고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때리는 공격도 날카로웠다. 한창 때 가볍게 30득점을 넘던 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팀이 필요한 순간마다 클러치득점을 해줘 영양가는 높았다.

황연주는 “많이 때리지 않아서인지 아픈 곳도 없다. 전보다 몸이 더 좋아졌다”고 했다. 그도 한동안 고민했다. 연습경기 때도 출전기회가 적었지만 묵묵히 참고 기다리다보니 기회는 왔다.

황연주는 “웜업존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코트가 얼마나 귀중하고 행복한 곳인지 실감했다. 비주전 선수들의 출전을 향한 간절함도 알았다. 과거라면 몰랐을 것을 배웠다. 선수생활 이후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득점 하나가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선수생활이 끝나겠지만 조용히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어떤 선수라는 것을 보여주고 미련 없이 그만 두겠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배우는 것이 있다. 떨어진 힘과 넘겨준 주전자리를 대신해서 황연주는 간절함과 기다림의 중요성을 알았다.

KGC인삼공사의 한송이도 요즘 화려한 꽃을 다시 피우고 있다. 12일 도로공사 경기에서는 모처럼 두 자릿수 득점을 하며 60%의 높은 공격성공률을 기록했다. 16일 현대건설 경기에서도 12득점 53%의 공격성공률을 기록했다.

서남원 감독은 “한수지의 공백을 잘 메워주고 있다. 지난 시즌에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줄 선수였는데 팀의 사정에 따라 왼쪽 공격수와 센터로 들어가다 보니 감각이 떨어지고 출전기회도 많지 않았다. 미안했다. 이번 시즌에는 중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좋아졌다”고 했다.

윙 공격수와 미들블로커로 사용이 가능한 그의 재능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왼쪽과 중앙을 오고갔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곳에서 전문적으로 할 일을 주지 않는 상황이 야속 할만도 했지만 그는 받아들였다. “내가 필요하다면 개인욕심보다는 팀을 위해서 하는 것이 맞다. 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참고 기다리다보니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주전세터 이재은의 갑작스런 은퇴로 시작된 나비효과는 한송이까지 영향을 미쳤다. 주전세터 한수지가 GS칼텍스로 떠나면서 중앙을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했고 서남원 감독은 베테랑에게 그 자리를 안겼다.

한송이는 “배구를 잘하고 싶었다. 감독님이 믿음을 주셨다. 주위의 기대도 컸다. 이제는 선수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몇년 전에는 ‘이번 시즌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늘 경기가 선수생활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더 플레이 하나하나가 귀중해졌다. 지금은 배구할 때가 행복하다”고 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사소한 일에서 고마움을 배운다. 세월이 주는 지혜다. 한송이는 ‘유니폼을 입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의 뜻을 이제 잘 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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