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보훈처[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비무장지대(DMZ)와 바로 맞닿은 강원 철원군 승리전망대에 오르면 오성산 일대가 펼쳐진다.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국군·미군과 중공군이 43일간의 고지쟁탈전을 벌인 곳이다. 우리는 이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로 나눠 부르고 중국은 능선과 고지 사이 고개 이름을 따서 상감령(上甘嶺) 전투라 부른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처절한 혈투 끝에 오성산 정상은 군사분계선 북측에 편입된다. 그래서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한 승전으로 자평하고 ‘6·25전쟁에서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선전해왔다.

▷그 상감령 전투 때 중공군의 사진이 우리 호국영웅 포스터에 사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훈처는 9월 6·25전쟁 영웅으로 1952년 9월 13일 중공군으로부터 수도고지를 사수하다 전사한 공해동 육군하사를 선정했다. 그의 얼굴 사진도, 수도고지 전투 사진도 없어 다른 사진을 골라 썼는데 하필이면 상감령 전투의 중공군 사진이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실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는 글귀에다 한 달 뒤 일어난 전투의, 그것도 적군 사진을 실어 추모한 셈이다. 보훈처는 포스터를 제작한 민간업체에 책임을 돌렸으나 감수책임을 회피한 구차한 변명이다. 더구나 사진의 출처가 국립서울현충원 공식 블로그였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현충원 블로그에 중공군 사진이 국군 기록 사진인 것처럼 올라 있었던 것이다.

▷보훈처는 이미 배포한 포스터를 폐기하고, 블로그에서 사진을 내렸다. 사료 점검시스템을 구축해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한다. 단순한 실수일지라도 ‘국가유공자 및 제대 군인, 그 유족에 대한 보훈’이라는 본질적인 업무를 생각한다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더욱이 보훈처는 근래 들어 약산 김원봉에게 건국훈장 수여를 검토하고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 대해 전상(戰傷)이 아닌 공상(公傷) 판정을 하는 등 불필요한 갈등의 진원지가 됐다.

▷현 정부 들어 국가보훈처장은 장관급으로 다시 격상됐고 생존 애국지사에 대한 특별예우금 인상 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확대해 왔다. 나라를 위한 희생에 합당한 보상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세심한 배려도 중요하다. 하 중사는 “다리 잃고 남은 건 명예뿐인데, 명예마저 빼앗아 가지 말라”고 했다. 억울한 희생이 되지 않도록 명예를 지켜주는 것도 남은 우리의 몫이다. 고작 21세에 적군의 총탄에 스러진 공 하사가 이 포스터를 봤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보훈처#상감령 전투#호국영웅 포스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