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390원, 100원 특가… 쏟아지는 초저가 상품속 도사린 디플레 함정[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소비자물가 마이너스… 커지는 경고음
물건값 떨어진다는 기대심리로 소비자 지갑 닫고 기업 재고 쌓여
인플레보다 더 큰 부작용 우려… 한국 아직 디플레 상황 아니지만
경제지표서 불안한 징후 감지… 美中 분쟁 등 글로벌경제 위축
디플레 한번 빠지면 백약이 무효… 타이밍 놓치기전 선제대응 시급

주애진 경제부 기자
주애진 경제부 기자
라면 한 봉지 390원, 아메리카노 한 잔 990원, 와인 한 병 4900원.

최근 유통업계는 파격적으로 값싼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떻게든 소비자들의 닫힌 지갑을 열게 하려는 시도다. 봉지당 390원인 이마트24의 ‘민생라면’은 출시 3주 만에 100만 개가 팔렸다. 한 병에 4900원짜리 이마트의 ‘도스코파스 와인’은 8월 한 달간 28만 병 팔렸다. 헬스앤드뷰티(H&B) 스토어 ‘올리브영’이 최근 내놓은 ‘100원 특가세일’ 제품도 금방 ‘완판’됐다.

유통업계의 초저가 경쟁에는 디플레이션(Deflation)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파격적으로 싼 물건이 아니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을 읽을 수 있어서다. 디플레이션은 경기가 침체되면서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 마이너스(―0.04%)를 보이면서 디플레이션이 한국 경제를 삼킬 수 있다는 ‘D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공급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일축했지만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도 9일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는 걸 막기 위해 과감하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정말 디플레이션을 앞두고 있는 것일까.

○ 인플레이션보다 무서운 디플레이션

‘인플레이션은 나쁘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그보다 더 나쁠 수 있다.’

경제학 입문서로 유명한 ‘맨큐의 경제학’은 디플레이션을 인플레이션보다 무서운 현상으로 표현한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자의 구매력은 떨어진다. 같은 물건을 더 비싼 값에 사야 하니 좋을 리 없다. 반대로 물가가 내리면 소비자의 구매력은 높아진다. 언뜻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 지금처럼 경기가 나쁠 때는 부작용이 더 크다.

물건 값이 계속 떨어진다는 기대심리가 생기면 소비자는 소비를 미룬다. 재고가 쌓이면 기업은 신규 투자를 미루고 생산을 감축한다. 이로 인해 고용이 줄어들고 임금이 하락하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어든다. 또 채무자의 실질 빚 부담이 증가해 실물자산을 저가 투매하면 자산 가치를 끌어내려 수요를 더 위축시키게 된다. 디플레이션이 무서운 건 이처럼 심리적 불안이 실제 위험으로 나타나는 ‘자기실현적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물가가 2년 이상 하락하는 것을 디플레이션으로 규정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은 아직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 징후들이 속속 감지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1월부터 7개월 연속 0%대였다. 올해 연간 물가 상승률이 0.5%를 밑돌 것이란 전망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부는 최근의 저물가 흐름이 농축산물 가격과 국제유가 하락, 무상복지 확대 등 공급 요인 때문으로 분석한다. 반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우리 경제는 대내외 수요가 위축되며 전반적으로 부진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지난달 마이너스 물가에 대해서도 “수요 위축에 공급 측 기저 효과가 더해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7월 소매판매액은 작년보다 0.3% 줄어 5개월 만에 하락 전환했다.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는 92.5로 2017년 1월 이후 가장 낮았다. 소비, 수출, 투자 등을 포함한 종합물가지수인 GDP디플레이터가 올 2분기(4∼6월)까지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인 점을 근거로 이미 디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 디플레이션 먼저 겪은 일본 대만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저물가가 이어지자 한국이 일본식 디플레이션의 진입로에 서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초반 자산시장 버블이 붕괴된 뒤 극심한 수요 부진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1995년 소비자물가가 하락한 뒤 몇 차례 일시적 반등을 제외하고 20여 년에 걸친 만성적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과잉 설비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들이 투자를 줄였지만 정부의 경기 부양책 덕분에 일본은 1990년대 중반까지 그럭저럭 2%대 성장률을 유지했다. 하지만 자산가치 하락과 소비심리 위축으로 불안했던 일본의 민간소비가 1997년 소비세 인상을 계기로 추락하면서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빠른 속도의 고령화도 디플레이션을 부추겼다. 실물자산을 많이 가진 고령 인구가 소비를 더 급격하게 줄였고, 이들의 노동시장 진입은 명목임금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일본보다 빠른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이 우려할 부분이다.

일본처럼 장기간은 아니지만 대만 역시 2001∼2003년 마이너스 물가를 경험했다. 당시 중국으로의 투자가 급증하면서 대만 내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킨 것이 수요 부진으로 이어졌다. 대만의 해외 투자는 1990년대 연평균 25%씩 증가했다. 대부분 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으로 생산기반을 옮기는 방식이었다. 대만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1% 안팎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성장동력이 약해진 대만은 2000년대 초반 글로벌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라는 외부 충격에 버티지 못했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임금 하락도 물가를 끌어내렸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소비 부진과 자산가치 하락이 동시에 이뤄진 일본이나 특수한 대내외적 환경이었던 대만과는 다르다. 하지만 고령화 등 구조적 취약 요인이 있어 안심할 수는 없다.

○ 글로벌 경기 둔화로 커지는 경고음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디플레이션의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글로벌 교역이 크게 위축되자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의 제조업부터 적신호가 켜졌다. 미국 제조업 경기는 3년 만에 둔화했고 월평균 고용 증가폭은 15만8000명으로 지난해 평균치인 22만3000명을 크게 밑돌고 있다. 독일은 7월 산업생산이 작년보다 4.2% 감소하는 등 제조업 침체의 여파로 2분기에 이어 3분기(7∼9월)에도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경제는 6%대 성장률을 위협받는 지경이다. 지난달 중국의 산업생산은 작년보다 4.4% 늘어 2002년 2월 이후 증가폭이 가장 작았다.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로 꼽히는 생산자물가는 7, 8월 연속 마이너스였다. 리커창 총리는 16일 “중국 경제가 6% 이상 성장률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도 소비, 생산, 수출 등 경제지표가 전반적으로 부진하다. 7월 IMF는 올해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3%에서 3.2%로 하향 조정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국은 경기 하강과 디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한 선제조치를 앞다퉈 내놓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12일 예금금리를 ―0.4%에서 ―0.5%로 더 낮추고 지난해 12월 중단했던 자산 매입 프로그램(양적완화)을 재가동하기로 했다. 중국은 16일부터 중앙은행인 런민(人民)은행의 은행권 지급준비율을 0.5%포인트 낮춰 시중에 9000억 위안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 미국과 일본도 이번 주 추가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 수출 부진 심해지면 물가 추락 우려

전문가들은 지표상의 물가 하락보다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와 생산을 줄이는 ‘기대 디플레이션’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지난달 마이너스였던 물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시설 피습 사태 등 외부 요인에 의해 금방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계 숫자와는 별개로 이미 제조업과 유통업, 자영업자들은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들이 가격을 낮추다 못해 생산을 줄이기 시작하면 고용과 임금이 하락하고 그 타격은 고스란히 소비로 이어진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표상 물가 상승률이 회복된다고 해도 경제 주체들의 비관적 전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물가가 마이너스가 아니라도 디플레이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디플레이션은 한 번 빠지면 ‘백약이 무효’하다. 금리 인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과 달리 금리 인하 등 정책 수단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실제로 닥치기 전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아 글로벌 경기 둔화에 더 취약하다. 9개월째 내리막을 걷고 있는 수출이 더 나빠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물가는 언제든 더 추락할 수 있다. 과도한 공포를 차단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책적으로 대응할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된다. 정부는 한국 경제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
#소비자물가#디플레이션#인플레이션#소비자물가 상승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