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위문금 모아 장학금 기부한 후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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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 한기악 선생의 손주 11명… 조부 모교 중앙고에 1100만원 쾌척
유공자 후손에 주는 위문금… 年20만원 5년치 계산해 내놔
“소소한 금액… 학생에 도움 되길”

제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이달 14일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의 발전기금 계좌에 1100만 원이 입금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월봉 한기악 선생(1898∼1941·사진)의 손주 11명이 보낸 장학금이다.

올해부터 서울시는 독립유공자의 직계 후손들에게 광복절과 3·1절, 연 2회 10만 원씩 위문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월봉 선생의 손주 11명도 수혜자 명단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가 준 ‘위문금’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향후 5년간 받게 될 위문금을 미리 계산해 1100만 원을 중앙고에 전달했다.

후손 중 한 명인 한경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63)는 “새삼 위문금을 받는 것에 대해 사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님이 공부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근무하신 중앙고에 기탁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월봉 선생과 중앙고의 인연은 특별하다. 그는 현 중앙학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법무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에 돌아와선 언론인으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에 헌신한 지식인이었다.

차남인 고 한만년 씨도 학교와 인연이 깊다. 월봉 선생이 일찍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었지만, 중앙학원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으며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1953년 학술전문 출판사인 ‘일조각’을 세웠다. 한 씨의 자녀 5명 중 3명은 서울대, 나머지는 각각 연세대와 성공회대 교수가 돼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달 2일 한 교수는 중앙고에 “독립유공자의 직계 후손이라며 서울시가 위문금을 준다고 합니다. 저희가 받을 그 돈을 학생들을 위해 써주십시오”라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주변에는 장학금 기부 소식을 철저히 함구했다. 한 교수는 “소소한 금액이기도 해서 가족들끼리 조용히 진행하기로 했다”며 말을 아꼈다.

그 대신 그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남들처럼 할아버님(월봉 선생)의 정을 느끼며 자라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다”며 “(기탁 금액이) 얼마 되지 않지만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중앙고 관계자는 “워낙 겸손한 분들이라 따로 행사도 없이 장학금만 보내왔다”고 전했다.

김종필 중앙고 교장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대의 뜻을 헤아려 나라에서 주는 위문금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이 큰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앞서 한 씨의 자녀들은 2016년 아버지의 모교인 이곳에 5000만 원을 기부했다. 일반고보다 학비가 비싼 자율형사립고인 중앙고에서는 매년 2명의 학생에게 ‘한만년 장학금’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월봉 한기악 선생#독립유공자 위문금#장학금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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