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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하나 그리며 지우길 수차례… 몇시간뒤 손가락이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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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하나 그리며 지우길 수차례… 몇시간뒤 손가락이 굳어 버렸다

김기윤 기자 입력 2019-08-19 03:00수정 2019-08-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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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혁 웹툰 ‘랜덤채팅의 그녀’ 선따기 보조작가 참여해보니…
“보세요. 여기 또 구멍이 있네요. 이런 실수가 있으면 뒷사람이 채색하는 데 애를 먹어요.”

서울 용산구에 있는 박은혁 작가(25)의 인기 웹툰 ‘랜덤채팅의 그녀’ 작업실.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는 꽤나 쾌적했지만 자꾸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분명 밑그림만 따라 그리면 되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고 했는데…. 만화 채색 전에 캐릭터의 기본 선을 그리는 일명 ‘선 따기’는 생각과 전혀 달랐다. 몇 번 하면 익숙해질 줄 알았더니 갈수록 실수 연발. 아, 괜히 한다고 했나.

웹툰 팬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기시감이 있다. 대다수 작가들은 꼭 한 번쯤 펑크를 내거나 1년에 한두 번 휴재를 한다. 자초지종은 비슷하다. ‘며칠씩 밤을 새우다 건강을 해쳤다’ ‘휴일도 없이 만화에 매달리다 지쳐 버렸다’ 등등. 도와주는 어시(어시스턴트·보조 작가)도 많고 돈도 잘 벌면서…. 직접 작업실 어시를 경험해본 뒤 ‘별것 아니다’라고 폭로를 퍼부어 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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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사이트에 따르면 독자들이 스크롤을 내리며 웹툰 한 회를 완독하는 시간은 평균 약 30초가 걸린다. 그런데 작가들이 이 한 회를 만드는 데 쏟는 시간은 약 150시간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그린다면 한숨도 안 자고 6.25일이 걸린다는 얘기다. 에이 설마. 하지만 ‘스윽스윽’(펜 그림 소리)과 ‘타닥타닥’(키보드 소리)만 가득한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잘못 발을 들였단 불안이 몰려왔다.

웹툰 ‘랜덤채팅의 그녀’의 박은혁 작가가 캐릭터의 밑그림 콘티(왼쪽 사진)부터 선 따기, 채색, 명암 작업까지 홀로 마친 모습. 배경과 대사가 더해지면 한 장면이 완성된다. 기자가 참여한 선 따기 과정은 채색 전까지 그림의 선과 기초를 다지는 중요 과정이다. 이후 작업자를 위해 빠르게 선을 정리하는 게 핵심이다. 강래현 디지털뉴스팀 인턴기자가 촬영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무작정 태블릿PC 펜이 손에 쥐어졌다. 주로 캐릭터의 머리카락과 옷 선 등을 정리하는 ‘선 따기’ 업무를 배당받았다. 시범을 보여줄 땐 별것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리 수전증이 생겼는지. 선 하나를 그릴 때마다 지우길 대여섯 번씩. “처음치곤 잘하는 편”이라며 당근 전략을 쓰던 박 작가의 말수는 어느새 줄어들고 있었다. 뒤통수에 꽂히는 건 정색한 눈빛인지 한숨인지. 그리고 잘생긴 주인공 얼굴은 갈수록 찌그러지고 있었다.

‘랜덤채팅의 그녀’는 초보 수준 작화로 나갔다간 난리 나는 인기작이다. 2017년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1020세대에게 호응이 크다. 학원 연애물인지라 비주얼이 매우 중요하다. 박 작가는 “당시 심심풀이로 유행하던 ‘랜덤 채팅 앱’을 쓰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며 “채팅으로 우연히 만난 이가 같은 반 친구임을 알게 되는 묘한 감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독자에게 짜릿한 연애 감정을 전하는 작품이지만 막상 작가는 인간관계가 다 끊겼단다. 처음 작품을 시작할 땐 일 아니면 잠의 연속이었다. 현재는 박 작가를 돕는 어시 작가가 3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시간이 부족하다.

“솔직히 친구 만날 시간도 없었습니다. 매주 마감 뒤에 갖는 3시간의 휴식이 전부였어요. 어시 작가를 구한 뒤에야 처음으로 이틀 연속으로 쉬어봤어요.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상상했다간 큰코다치죠.”

‘랜덤채팅의 그녀’ 한 회에 들어가는 그림은 평균 150컷 안팎. 컷마다 ‘밑그림 콘티’ ‘인물 선 따기’ ‘밑색 깔기’(옷, 피부, 배경 채색) ‘명암’ 등으로 업무를 나눠 진행한다. 물론 스토리와 총연출은 메인 작가의 몫. 한 컷마다 보통 들어가는 시간은 1명당 약 20∼30분.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는 데만 매일 9∼12시간이 걸린다.

박은혁 작가는 “저 역시 다른 작가를 도우며 오랜 시간 작화법, 스토리 구성법을 배웠다”고 했다(왼쪽 사진). 기자가 직접 그린 주인공 얼굴은 선이 거칠고 곳곳에 빈틈이 많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작업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하루 이틀이나 낮밤은 저희에게 크게 중요치 않아요. 매주 마감을 앞두고 늘 1주 단위로 사는 것 같아요.”

한 회 작업을 다 마쳤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곧장 이들은 마무리 컷을 위해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박 작가는 “드라마처럼 마지막 장면이 재밌어야 다음 화도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최종 결정은 제가 하더라도 팀원들과 상의해 필요하면 마지막에 몇 컷을 늘려서 끝을 살리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사전·사후 작업도 만만치 않다. 사전에 배경으로 활용할 사진 촬영을 하는 답사가 필요하다. 작품을 업로드한 뒤에도 회사와 독자 요청에 따라 맞춤법을 교정하고 수위를 조정하는 등 일이 많다. 박 작가는 “특히 사전 답사가 중요하다. 자료 수집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의 기술 발달이 너무나 고맙다. 배경 사진을 그림으로 만드는 작업이 간편해졌다. 캐릭터도 반복해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손이 빨라진다. “같은 주인공 얼굴을 몇백 번 그리면, 나중엔 눈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거든요.”

겨우 몇 시간 동참했을 뿐인데 벌써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골병든다’는 말은 정말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어차피 비슷한 얘긴데, 좀 설렁설렁 그리면 되지 않을까. 미소를 잃지 않던 박 작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충 보며 넘기는 독자도 있겠죠. 하지만 많은 팬들은 깨알 같은 디테일까지 다 알아보고 댓글을 남겨줍니다. 며칠씩 고민한 흔적을 알아주는 게 얼마나 짜릿한데요. 웹툰은 이런 소통하는 맛이 주는 희열이 가장 커요!”

그래, 앞으론 다시 독자로 돌아가 소통만 해야겠다. 쓴소리도 마구 남겨야지. 한데 이놈의 손가락 언제쯤 제대로 움직이려나.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랜덤채팅의 그녀#선따기 보조작가#박은혁 작가#웹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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