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쟁,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오늘과 내일/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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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크게 좁혀졌으나 일본 우위는 사실
승자 없는 경제마찰 이쯤에서 멈추기를

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요즘 지방에 가보면 조그만 읍내 사거리에도 어김없이 반일(反日) 현수막이 붙어 있다. ‘안 사요, 안 가요, 안 먹어요’는 기본이다. ‘경제도발 다시는 지지 않습니다’ ‘경제침략 우리가 이깁니다’처럼 각오를 다지는 내용이 많다.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든 저질 욕설에 가까운 내용이 큰 정당이나 사회단체 이름으로 붙어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서울 도심에서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죽창가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촉발돼 수출 규제,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 상호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이 상황이 격화될 경우 현수막의 내용처럼 과연 한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 조선, 대한제국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한 국가의 경제 규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국내총생산(GDP)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한국의 GDP는 31억 달러, 일본은 909억 달러로 약 30배 격차였다. 개인의 소득 수준을 보여주는 1인당 GDP는 한국 109달러, 일본 920달러로 일본이 한국의 약 9배였다. 2018년 한국의 GDP는 그동안 무려 522배가 증가한 1조6194억 달러로 세계 11위가 됐다. 세계 3위 일본의 4조9719억 달러와는 약 3배 차이로 좁혀졌다. 1인당 GDP에서 한국은 3만1346달러로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의 3만9306달러에 바짝 추격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는 ‘흐름의 한국, 축적의 일본’(2018년)에서 2002∼2017년의 추세를 감안하면 한국이 3, 4년 후에 일본을 따라잡거나 앞서는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배경에는 과거 우습게 봤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에 대한 경계심과 견제 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한민국 위상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현수막에 걸린 내용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선동처럼 한국이 일본과 맞붙어도 될 정도가 되었느냐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좁혀졌다고는 하나 연간 생산 규모가 한국의 3배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100년 넘게 축적된 자본과 기술을 감안하면 동원 가능한 물자의 격차는 이보다 훨씬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경제 구조를 봐도 한국이 취약한 편이다. 수출입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은 70%로 수출 위주 국가다. 일본은 28%로 내수 중심의 국가다. 인구는 한국이 5100만 명, 일본은 1억2000만 명. 서로 같은 타격을 주고받는다고 해도 한국이 받을 충격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허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승패를 가르는 데 객관적인 전력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전쟁에서 승리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일본이 한국을 반드시 이긴다고 볼 수도 없다. 비록 객관적인 조건에서 앞선다고는 하나, 앞에는 강한 적이 있고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이른바 ‘사지(死地)’에 상대를 빠뜨리면 상대도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승자 없는 전쟁, 모두가 패자인 전쟁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대형 서점에 가보면 손자병법은 군사학보다는 경영·처세 관련 코너에 더 많은 해설서가 깔려 있다. 손자병법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을 말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즉 부전승(不戰勝)이 기본 정신이다. 백성과 국가의 존망을 생각해 전쟁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는 신전론(愼戰論)이 핵심이다. 특히 서로 피해가 막대해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공성전(攻城戰)은 최하책이다. 경제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고 한다. 불과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만으로 한국 경제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쯤에서 접고 양국 모두 자유무역의 정도로 돌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반일#한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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