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204〉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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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황인숙(1958∼)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비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나는 제법 착해 보인다. 예전에는 장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내 곁에는 수년간 유독 내게만 부탁하는 친구들이 있다. 수십 년째 아주 많은 것을 의지하는 가족도 있다. 매번 고맙다고는 한다. 예전에는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뻤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감정의 하수구’가 되어 오늘 하루 힘들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왜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기분이 더러웠는지를. 소중한 타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정의 하수구가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시는지. 하수구에도 처리 가능 용량이라는 게 있다. 다시 누군가를 욕하기 위해, 푸념하기 위해, 다 징징대고는 아주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고마워” 말하기 위해 너는 오늘도 전화를 한다. 울리는 전화를 보니 오늘은 하수구가 역류할 것 같다. 나는 황인숙의 시집으로 도피한다. 특히 ‘강’이라는 작품은 얼굴도 모르는 시인에게 ‘어머,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멋지다.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니 아우, 시원하다.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라니, 지금 딱 나의 심정을 시인이 먼저 아셨다. 이럴 땐 시한테 엄청 고마워진다. 내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것이 이미 시에 있다. 그것도 몹시 정확하게 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강#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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