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 골프선수와 캐디 그 오묘한 관계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5월 27일 1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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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빈. 사진제공|KLPGA
임은빈. 사진제공|KLPGA
2주 전에 끝난 두산 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나왔다.

연장전을 벌이던 중에 티샷이 숲 속으로 들어간 어느 선수가 캐디와 계속 말씨름을 했다. 나무 뒤에 떨어진 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중계방송사의 카메라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냈다. 이들은 부녀지간이었다.

딸을 위해 캐디백을 메고 골프장을 누비는 골프대디는 많다. 대한민국 여자골프에서만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경기를 하다 보면 골프선수와 캐디는 의견이 다를 때가 생긴다. 이럴 때 서로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하지만 말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일이다. 곁에서 조언하는 캐디와 엄청난 부담 속에서 실제로 몸을 움직여 결과를 내야 하는 선수가 판단하는 것이 다를 때도 많다. 그래서 경기 도중 말다툼은 일어난다. 간혹 이것이 지나쳐 경기 도중에 선수가 캐디를 해고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선수와 캐디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다. 타인이라면 언제든지 칼자루를 쥔 선수가 캐디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겠지만 가족이고 아버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버지 캐디는 자신이 골프선수가 되도록 어린 시절부터 지원했고 힘든 훈련을 지켜본 사람이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딸의 성공을 위해 무거운 캐디백을 메고 땡볕 속에서 응원하는 심정으로 곁에서 따라다닌다. 물론 딸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가족이기 때문에 더 주관적이 되고 애가 타면서 감정이 들어간다. 그래서 평소보다 혹은 타인보다 더 예민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위에서 언급했던 그 선수는 말싸움 후유증 때문인지 경기를 지고 말았다. 26일 E1채리티 오픈에서 93경기 만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임은빈(22·올포유)은 반대의 경우다. 우승 뒤 인터뷰에서 캐디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투어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버지와의 호흡”을 말했다. 그는 “가족이니 당연히 욕심이 들고 아버지께서도 떨리실 때가 있다. 욕심을 가질 때 호흡이 좋지 않았다. 평소 아버지가 내 말을 잘 들어주신다. 다른 부녀들보다 대화를 많이 한다고 자부한다. 함께여서 힘이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의 첫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18번 홀 세컨드 샷을 앞두고 어떤 클럽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딸에게 귀중한 조언도 했다. 경쟁자 이소미(22·SBI저축은행)의 타구가 길어서 그린을 벗어나는 것을 본 아버지는 짧은 클럽을 권했다. 결국 그 선택이 맞았고 연장전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다.

5월 교촌하니 레이디스 오픈에서 KLPGA투어 167번째 대회 만에 처음 우승한 박소연(27·문영건설)도 아버지가 캐디다. “루키 시절 아버지가 캐디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의 성적이 좋았다. 아버지 성격이 변하시고 나서 싸우지 않고 좋은 플레이를 하게 됐다. 사실 나는 캐디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이 아니라 아버지가 편하다”고 했다. 이번 시즌 다시 캐디백을 맨 아버지는 딸의 티샷이 흔들렸을 때 “괜찮다”고 다독여줬고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딸은 그런 아버지가 고마워 우승상금을 받자마자 고급 시계를 선물했다. “첫 우승상금을 모두 아버지에게 써도 좋다”고 딸은 말했다.

2013년 E1채리티오픈에서도 캐디 아버지와 딸의 우승 스토리가 있었다. 주인공은 이번 대회에서 KLPGA투어 통산 300경기 출전을 달성하며 기념식을 가졌던 김보경이다. 당시 딸을 위해 9년째 캐디백을 맸던 아버지는 골프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9번 홀에서 “4번 아이언 대신 7번 우드를 잡아라”고 권유했고 이것이 우승의 원동력이 됐다.

미 LPGA 마라톤 클래식에서 157번의 도전 끝에 우승했던 최운정의 곁에도 항상 아버지 캐디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경찰관 직업을 포기하고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캐디백을 매고 8년을 고생했다. 최운정은 “아버지가 최고의 캐디라는 남들에게 보여준 것이 정말 기쁘다”고 우승소감을 말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딸의 성공을 원한다. 때로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어설프거나 지나쳐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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