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미술상 수상 박미화 작가 “유학도 복귀도 운명처럼 다가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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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인천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박미화 작가. 품에 안고 있는 작품은 새(2017년), 왼쪽 작품은 소녀입상(2018년). 자신의 작품을 안아 든 박 작가는 “아기를 안는 기분”이라고 했다. 강화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22일 인천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박미화 작가. 품에 안고 있는 작품은 새(2017년), 왼쪽 작품은 소녀입상(2018년). 자신의 작품을 안아 든 박 작가는 “아기를 안는 기분”이라고 했다. 강화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5년 전 자동차가 반파돼 죽지 않은 게 기적이라 할 정도의 사고가 났어요. 그때 깨달음을 얻었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예의와 미안함이 필요가 없구나….’”

22일 인천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제4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 박미화 작가(62)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넓은 작업실은 엄두를 못 냈던 그는 사고를 겪은 뒤 뭔가에 휩쓸리듯 움직였다.

“남편에게 ‘많이 생각했는데, 필요한 것 같아 계약했어’라고 통보했어요. 미친 짓을 한 게 아닌가 걱정도 했죠. 그런데 그 뒤로 작업도 인생도 바뀌고 있습니다.”

아내이자 엄마로 살았던 박 작가의 작업 활동엔 많은 ‘운명’이 작용해야만 했다. 그녀가 서른 살 무렵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우연한 기회였다.

“처음 미국에 간 건 남편의 업무 때문이었어요. 그때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일하면서 준비를 했어요. 1년 뒤 한국에 돌아와 남편은 시댁에 보내고,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2년 동안 유학을 떠났습니다.”

해외여행도 흔하지 않았던 1980년대의 일이다. 그는 “가정을 버리고 떠난, 한마디로 나쁜 여자였다”고 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 눈물도 흘렸지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독하게 공부를 했다.

그러나 40대에 다시 한번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개인전을 다시 연 것이 12년 만인 2007년. ‘늦깎이’ 전업 작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엔 여린 것들, 버려진 것에 대한 따스한 공감이 묻어난다.

박 작가의 작업실 한 구석에는 버려진 목재가 울타리처럼 세워져 있다. 이처럼 버려진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스티로폼을 활용한 ‘버드나무 비석’을 만들기도 했어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물질이 있는데, 굳이 무언가를 새로 사고 소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박수근미술상 심사위원단이 그의 작품에서 ‘휴머니즘’을 끄집어낸 것은 “신기했다”고 털어놨다.

“특별히 ‘휴머니즘’을 의식하고 작업하진 않았어요. 그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업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읽힌다니 신비로웠죠. 시각예술이 거짓말을 하기 힘든 장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피에타’ 도상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쓸쓸하고 불쌍한 어린 양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이미지라고 했다. 또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관념보다는 몸으로 느껴지는 물질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도 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기 손가락이 다치면 아픈 것이 중요하잖아요. 그런 몸으로 하는 공감으로 다른 생명을 이해하면 평화가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박 작가는 폐광촌에서 예술 활동을 펼치는 ‘할아텍(할 예술과 기술)’의 ‘철암 그리기’에도 10년 넘게 참여하고 있다. 할아텍은 2001년 작가 서용선, 이경희, 류장복이 설립한 비법인 문화활동단체.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했기에 수상 전화를 받았을 때도 “가장 먼저 할아텍이 생각났다”고 했다.

“4, 5년 동안 꾸준히 달려와 잠시 작업을 쉴까 했는데, ‘박수근미술상’이 다시 채찍질을 해줬어요. 상을 주신 분들에게 죄송하지 않도록 해왔던 대로 열심히 작업하겠습니다.”

강화도=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박수근미술상#박미화#새#소녀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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